[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꽤 긴 기간 방영된 노래경연의 끝부분을 보았다. 여섯 명이 남아 마지막 공연을 했는데 실력들이 쟁쟁했다. 나도 마음으로 한 사람을 응원하며 보았는데 우승은 못했어도 짙은 감정 표현과 강한 호소력이 있었다. 최종 점수표를 보고 나서 이야기의 강한 힘을 보았다.

강한 이들이 땅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세월이 흐르면 이야기가 살아남아 세상을 이루어 간다. 미술사에 대단한 화가들이 많아도 강한 이야기가 있는 반 고흐를 무시할 수 없고 스페인 관광에서 가우디를 제외하기 어렵다. 고전이 된 작품을 낳은 소설가들이 오랫동안 기억되어 사랑을 받는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경구처럼 그들의 이야기가 오래 살아남아 세상에 빛을 던져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대단하지만 일연의 ?삼국유사》를 꼽는 것은 그 안에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이 숨 쉬고 있어서다. 인간은 본능으로 이야기에 끌리고 이야기를 통해 동질성과 문화를 이어내려 인간다움을 공감할 수 있었다. 이 땅에 이야기로 세대를 이어가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경연 결과와 이야기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내 눈에는 최종순위가 참가자들의 화제성과 일치해 보였다. 결과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게 시청자 투표였는데 그들이 무엇에 근거해 표를 주었을까?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마음이 가는 이에게 투표했을 게다.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이 화제성이요 이야기꺼리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낮은 저음에 쉰 듯한 목소리로 많은 열등감을 갖고 살아온 과거와 끝내 자신의 무대에 모시지 못하고 여읜 아버지에의 애달픔이 우승자의 이야기라면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로 탈락과 추가합격을 연거푸 네 번이나 이루어낸 끈기와 희망은 준우승자의 사연이었다. 극한의 고음을 가지고 오랜 세월 무명으로 갈등을 겪으며 부부가 함께 밴드생활을 이어온 3위를 한 가수의 이야기도 들어줄 만하지 않은가?

이야기의 핵심은 자신만의 차별성이다. 경쟁과 비교가 아닌 긴 세월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여물고 쌓여 거두는 이삭 같은 것이요 빠질 수 없는 게 실패와 고생담이다. 짧은 기간에 정상에 오르면 맛이 들 여지가 없다. 목표를 향해 좌우 돌아보지 않고 달려간 셈이니 그 과정에서 무얼 본 게 있을까? 새로운 기록이야 세웠겠지만 어떤 인간미나 들을 만한 이야기가 있을까?

담을 쌓는 일이라면 쌓다가 허물어지기도 하고 떨어져 죽을 뻔한 고비도 겪으며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인간적 친밀감이 형성되는 게다. 오늘을 사는 이들은 이제 알아버렸다. 우리의 1960년대식 위인전은 인간미도 없고 사실일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태어날 때 하늘의 징조는 없었고 어려서부터 영웅적인 일을 하지도 않았을 게다. 그들도 갓난아이 때에는 대소변 못 가리고 부모 속 썩이고 또래들과 티격태격하며 성장했고 기억될 일을 이루기 전에는 많은 이들이 눈여겨보지도 않았을 게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넘어지고 머뭇거리고 갈등을 겪으며 자신의 길을 찾아내 다수와 상식을 따르라는 주변의 권유와 압박을 이기고 자기만의 좁은 길을 가면서 쓰고 시고 떫은 실수들이 세월과 함께 익어 듣는 이들로 공감하고 눈물짓게 하는 이야기가 되고 그 분야에 살아있는 일화가 되는 것 아닐까? 오늘 자신의 이야기를 써가는 이가 내일의 주인공이리라. 그러니 이야기가 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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