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최원영 K-메디치 연구소장·전 세광고 교장

지역의 정체성을 구현하고 자부심을 고취하는 일은 지역을 상징하는 인물들을 기리는 과정 속에 시작된다. 국가 역시 민족혼을 일깨우고 문화를 진흥시킨 인물 추모를 통해 국민의 자긍심을 고취시킨다. 유럽의 도시를 방문하면 구도심의 중심에는 국가를 수호하고 문화발전에 이바지한 인물들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광화문에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 지역이 교육과 문화의 도시로서 위상을 갖추게 된 것은 흥덕사지라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도 있지만, 예관 신규식 선생을 비롯한 교육구국운동 선각자들의 공로에 힘입은 바가 크다

예관 신규식 선생(이하 예관)은 단재 신채호 선생과 더불어 한말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섰고, 일제 강점기에는 상하이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독립투사였다. 1880년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서 태어난 예관은 20세가 되던 해에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하여 장교로 활동했고, 고향에는 산동학교·덕남서숙 등을 세워 신학문 보급에 앞장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궐기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자결로서 그 뜻을 세상에 알리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안타까운 것은 자결 시도의 후유증으로 오른 쪽 눈에 이상이 생겨 평생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된 것이다. 본인의 호를 '흘겨보다'는 뜻의 예관(?觀)을 쓰게 된 동기도, 선글라스를 착용하게 된 경위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상하이로 망명한 예관은 국외 독립운동기지 구축에 앞장섰다. 중국의 신해혁명에 동참하여 쑨원을 비롯한 중국의 혁명지사들과 교분을 쌓는 한편, 동제사(同濟社)·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박달학원(博達學院) 등을 조직하여 국외독립운동의 중추적 일익을 감당하였다. 1917년 예관이 주도하여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은 민주공화정을 모토로 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사상적 모태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 임시의정원 부의장, 외무총장 등의 중책을 수행하며 임시정부를 이끌어나갔다. 무인이면서도 외교에 능했던 예관은 중국으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받는데 큰 역할도 하였다. 대동단결을 통한 투쟁만이 조국 독립의 첩경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예관은 임시정부가 내부 균열로 혼란에 빠지자 통합을 주창하면서 목숨을 건 25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이다 42세의 일기로 순국하였다.

최원영 세광고 교장
최원영 세광고 교장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예관의 위치가 지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지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예관의 유해는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으나 고향 가덕면에는 호적이 남아있지 않은 무적자 상태로 있다. 2022년 올해는 예관 순국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다.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예관의 사상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호적을 살리는 취적(就籍)사업과 함께 추모식, 학술회의, 시민강좌, 전시회 등 다양한 행사가 민관 합동으로 기획되고 있다. 특별히 4월 7일 오늘은 예관의 고향인 가덕면 인차리에서 '예관순국 10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창립 출범식을 갖는다. 시민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가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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