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김동우 논설위원

새벽 5시 현관 쪽으로 신문 던지는 소리가 난다. 손님을 맞이하듯 얼른 나가 신문을 들고 온다. 묵직하다. 오늘은 어떤 정보와 지식이 실려 있고, 어떤 이야기가 세상을 돌리고 있을까? 그것들로부터 얼마나 사고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을까? 자못 설렌다.

왜 신문을 볼까? 신문을 보는 동안 생각하는 자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피사체가 필름에 맺히듯 신문을 보면 글자(기사)가 망막에 맺힌다. 그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뇌리로 전달되어 정보와 지식의 축적, 이미 축적된 정보와 지식의 상호작용, 지혜 창출이 일어난다. 이 과정을 통해 사고의 영토가 확장된다. 사고의 영토 확장이 바로 '생각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정신 활동'이다.

지난 4월 7일, 제66회 신문의 날이었다. 1957년 신문의 날이 제정되었다. 3년 뒤 표어 선정을 시작했다. 첫 번째는 '언론의 자유', 다음 해는 '악법의 철폐', 그다음 해는 '신문의 책임'이었다. 한국동란 이후 좌우 대결 등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했다.

올해 표어는 어느 해보다 참으로 인상 깊다. "신문 읽기 사이에는 생각하는 자리가 있다." 선정 근거는 "뉴스 포털에 대비한 신문의 장점, 정보 매체로서 신문이 갖는 고유의 역사적 가치, 신문에 대해 독자들이 갖는 정서적 가치 모두를 담아냈다. 형식도 기존의 대구(對句) 형식에서 벗어나서 읽는 사람에게 생각과 정서를 강요하지 않는 여백의 울림을 줬다."는 점이다.

디지털 시대 현대인은 점점 신문과 거리를 둔다. 영상매체 등 뉴미디어에 그 원인이 있다. 뉴미디어는 정보와 지식 전달력이 신속하고 전달 양이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전달 메시지가 맛깔스럽기 위해 정보 등에 온갖 자극적인 조미료를 치는 게 문제다. 여과되지 않은 내용이 난무한다는 얘기다. 특히 무한경쟁에서 생존전략은 신속, 간결, 간편이고, 정보와 지식 습득에 시간 절약이 필수적이어서 신문 볼 시간을 내지 않는다. 생각할 여유가 없다. 보고 듣는 것에 만족한다.

'신문의 위기'다. 인간과 사회를 섭렵하는 '움직이는 백과사전'의 신세가 말이 아니다. 2020년 신문 정기구독률이 6.3%다. 100가구 중 6가구 정도 신문을 본다. 뉴미디어만 탓하기에는 명분이 없다. 언론인 스스로 신문의 사명과 책임을 자각하고 자유와 품위 등을 강조하기 위해 제정한 '신문의 날'의 취지를 인식하고 실천하는가? 신문 읽는 사이에 생각하는 자리가 있는데 왜 현대인이 신문을 외면하는지 언론인은 자문자답하라는 얘기다.

김동우 논설위원
김동우 논설위원

새벽 신문을 기다리는 이유는 밤새 뒤숭숭한 꿈으로 어지럽혀진 뇌리를 신선한 정보와 지식으로 정돈하고 삶의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서다. 읽고 나면 신문은 가볍고 머리가 무겁다. 신문은 보고 읽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은 생물이다. 신문 읽기는 보이는 것 너머 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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