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새벽 낭랑한 목소리가 반갑지 않다. 이런 증상 뒤에 콧물감기가 온다는 걸 안다. 환절기에 들어서면 감기가 나를 찾아온다. 연례행사처럼 해마다 한 차례씩 심하게 앓는다. 드러누워 살려달라는 몸의 소리를 들으며 은근한 미열과 무기력으로 꼬박 하루를 보낸다.

어제부턴가 몸이 찌뿌둥하더니 기어이 탈이 난 게다. 재채기가 나고 콧물이 주르르 흘러 훌쩍거리니 체면이 서지 않는다. 개운치 못한 몸으로 뭔가를 해 보아도 집중할 수 없다. 고춧가루 푼 콩나물국에 밥을 먹고는 방바닥에 몸을 눕힌다. 이럴 땐 조금 과장된 몸짓과 소리가 필요하다. 가라앉는 몸으로 얕은 신음을 토하며 잠으로 빠져들었다.

얼마나 잔걸까? 아내는 괜찮은가 묻고 나는 조금 으스스하고 어지럽다고 대답한다. 아프다고 하면 듣는 말이 약 먹으라는 게다. 그러고 보니 식탁에 막내가 사다놓은 노란 알약이 있다. 일본어로 감기 제 증상을 호전시킨다는 문구가 있었던 것 같다. 따듯한 물 한잔에 알약 세 개를 삼킨다.

이걸 핑계로 오늘 하루는 쉬고 싶다. 내게 평일과 휴일의 구분이 있을까마는 꾀가 나니 조금 하는 일로부터도 벗어나고 싶다. 멀쩡하게 돌아다니며 쉴 순 없는 노릇, 다시 자리에 누워도 할 일이 별로 없으니 쉬는 것도 만만치 않다. 잠이야 깬지 얼마 되지 않으니 올 리 없고 휴대전화 보는 것도 한계가 있다. 무료함에 이리저리 돌려보는 방송도 신통한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럴 때는 공상(空想)이다. 눈을 감고, 자리에 누워 고생하던 내 모습을 회상해본다. 삼십대 중반 이른 봄철에 십여 일 뜻밖의 어려움으로 힘겨웠는데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심신이 약한 채로 많은 헛것들을 보았다. 가끔씩 마른 우물터에 물고이듯 힘이 축적되어 외출을 하면 어릿어릿 하면서도 새로움이 차올랐었다. 건강해지면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았는데 회복이 되자 다짐은 흐릿해지고 일상으로 빠르게 녹아들었다.

요즘 가끔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본다. 이삼십 대의 날들이 선명하지 않아 수시로 기억을 복원 중이다. 우울한 시절이었지만 오늘의 나를 만든 중요한 시기여서 돌아보고 싶다. 생각하면 방황의 시기였다. 그 시절에 꿈을 가진 누가 방황하지 않았을까? 허망하고 신기루 같은 일에 진지하게 매달리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자주 좌절했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이불속을 뒹굴며 시간을 보낸 덕인지, 알약의 효과인지 저녁이 되자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아직은 털고 일어날 적기가 아니다. 누워 방송에 눈을 주며 온전한 회복이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게다. 그동안 자신에 대해 더 추적해보는 것이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내가 목회자가 되었다. 내 선택으로 신학을 하고 필요 절차를 거쳐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어 교회 일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왜 나를 택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그 틈을 메우는 추론으로 부친이 장년시절 한때 신앙에 열심을 내신 적이 있다고 하니 자녀 한 명을 목회자로 바치기로 서원하지 않았을까 가정하는 게다. 계기가 되면 형과 누이에게 물어 보리라.

이번 감기가 스치듯 지나가 주기를 바란다. 하루를 쉬었다고 그만큼 자잘한 여러 일들이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 인사성 바른 감기들이 나를 모른 척 그냥 지나가 줄 수는 없으려나? 환절기마다 하는 내 고민이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