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영희 수필가

도심 보도블록 사이에 노란 민들레 한 송이가 활짝 피었다. 척박한 틈새를 강인하게 뚫고 올라와 마침내 은은한 노란빛 아름다움을 피워냈다. 기특하고 예쁘다. 넓은 들판에 자리 잡았다면 보슬보슬한 흙 위에서 찬란한 햇빛 온몸으로 받으며 야생화의 위용을 한껏 뽐낼 수 있을 텐데.

어쩌다가 씨앗이 바람에 날아와 여기 정착한 탓으로 행인들의 발길에 밟힐까 조마조마하다.

지나가던 소년도 그 틈에서 피어난 민들레가 기특한지 쪼그리고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안고 있던 강아지에게 이야기한다.

"들레야. 네 이름을 왜 민들레라고 지은 줄 알아? 이 열악한 환경을 극복한 민들레처럼 씩씩하게 자라라고 그렇게 지은 거야. 알았지?"라고 한다. 소년이 기특해서 이름을 잘 지었다고 했더니 그 강아지를 처음 살 때 장애가 있었다고 한다. 자기가 어려서 다리를 다쳐 동지애로 그런 강아지를 샀다면서. 그래서 매일 같이 뛰고 운동해서 지금은 좋아졌다고 하며 자기 다리를 보여주는데 흉터가 크다. 어른보다 생각이 깊은 아이가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얼마 전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장애인들의 시위가 진행 중이라 앞칸에서는 내릴 수 없으니 승객 여러분은 뒤 칸으로 이동해 달라는 멘트가 나왔다. 지하철이 멈추고 문이 열리면서 승강장에 휠체어를 탄 수십 명의장애인이 팻말과 현수막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지금도 이동권 투쟁을 하고 있다. 출구를 찾아 헤매던 장애인이 선로에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사회적 타살이다. 그런데도 보통 사람들은 우선 불편함에 눈살을 찌푸리고 혐오스러운 대상으로 바라본다.

장애인이란 몸이나 마음에 장애나 결함이 있어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제약받는 사람을 말한다. 일상적인 제약은 그들의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 공포'에서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마저 세계화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누구나 잠재적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이영희 수필가
이영희 수필가

요즈음 사자성어도 못 되는 '검수완박'이라는 신조어가 매스미디어를 도배하나 대개의 국민들에겐 강 건너 불인 그들만의 권력 리그다.

눈으로 보기만 한 사람은 흰 돌이라 하고 만져본 사람은 단단한 돌이라고 우기는 '흰 돌과 단단한 돌'이라는 우화가 '장자의 정원'에 나온다. 희고 단단한 것이 본디 하나여서 우주관에서 보면 모두 한 몸인데, 집주인·전세든 사람·집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니 같은 집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강아지에게 민들레란 이름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소년이 스승처럼 우러러보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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