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숲속에서 하루를 보내자고 찾아간 제천 주론산(舟論山), 바람소리 듣고 산길을 걸었다. 일제가 전쟁에 쓸 송탄유(松炭油)를 전국 소나무에서 채취했는데 그 흔적을 가진 소나무가 가장 많은 곳이 이곳이란다. 상처를 지닌 채 거목이 된 나무들, 잔악한 행위를 말없이 증언하는 것도 의(義)의 한 모습이다.

산이 자리 잡은 곳이 제천시(堤川市) 백운면(白雲面) 방학리(放鶴里)다. 둑을 쌓아 시내가 흐르고, 흰 구름 머무는 하늘 아래 학을 풀어놓은 곳, 이곳 산 이름이 이상하다. 주론(舟論), 산에 갑자기 웬 배일까? '배'라 하니 '배론 성지'가 떠오른다. 같은 산이다. 계곡 생김새가 배 바닥 같아 배론이라 했단다. 주론산은 또 주유산(舟遊山)으로 배가 노니는 형상의 산이다. 당시 청나라와 조선을 오가던 천주교 신부와 그 일행은 '배 바닥'이라는 바텀(bottom)을 '배럼' 혹은 '배런'으로 칭했으리라. 조선인들은 서신 왕래에 그곳을 한자어로, 뜻을 따르면 주유(舟遊)로, 음을 따르면 '배론'으로, 그 둘을 절충해 주론(舟論)으로 썼을 게다. 그곳에서 자신들이 옳다〔義〕고 여기는 일에 목숨을 바쳤으니 그 또한 의로운 삶이었다.

제천하면 의림지(義林池)요 의병(義兵)이니 의(義)의 도시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겪으며 분개한 지사(志士)들이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을사와 정미의병에 이르기까지 구국의 일념으로 싸움에 임해 의병활동 거점으로 제천이 두드러졌다. 현재도 매년 시월이면 의병제를 열고 의림동(義林洞)과 의병대로(義兵大路)가 있다.

목숨 바쳐 의(義)를 지킨 곳에 숲이 있으니 의림(義林)아닌가? 이곳 소나무들이 내는 소리는 소슬하고 의연했다. '쏴아, 쏴아…' 솔숲에서 들려오는 태고부터 불어온 자연의 숨결이요 내 마음을 흔드는 먼 기억의 그 무엇이었다. 그 시절엔 바람소리가 유난히 컸고 그 속에는 외로움과 결기를 느끼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하루를 자연 속에 묻혀 살자면서 챙겼던 책이 한 사학자의 그리스 여행기였다. 숲속에서 읽는 지중해 섬들 이야기가 운치 있었다. 그가 '바트모스' 섬을 여행했는데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밧모섬'이다. 뭍에서 격리되어 죄수들이 가는 곳, 삶이 얼마나 고되었을까? 오늘날도 채석장이 있다는데 당시 요한도 채석장에서 강제노역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바트모스 뜻이 '송진'이라니 상처에 흐르는 소나무 진액처럼 사람들 삶도 무척이나 힘들었으리라. 노동에 시달리다 돌아와 지친 몸을 누인 동굴 속, 그곳에서 천국의 계시를 본다. 하늘 뜻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지켜가는 삶도 의(義)로운 게지. 그 한 꼭지, 열악한 곳에서 꽃 피우는 이야기를 읽은 것만으로도 깊은 의미가 있다.

흑백사진을 찍어보잔다. 편안한 자세라고 취해도 어색하고 웃음이 잘 나오지 않는다. 촬영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본다. 나와 아내는 어색한 미소 속에 진지하고, 세 딸들과 사위는 얼굴에 웃음이 흐르고, 두 손녀는 초점과 무관한 자세다. 세대가 내려올수록 밝고 자연스럽다. 세대를 다시 거슬러 오르면 더욱 진지하고 심각할 게다. 흑백사진 속 아내와 나는 무언가를 꿋꿋이 지키려는 듯 보인다. 나름 의(義)롭게 살려는 의지겠지. 의(義)의 도시 제천에서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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