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오계자 수필가

무심코 지나칠 뻔 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춰지면서 눈씨는 피어오르는 물안개자락에 휘말려 들어갔다. 머리는 '어여가자' 멈춘 발씨를 재촉하지만 온 몸이 눈씨를 따른다. 물안개는 살풀이춤에 미친 한삼자락이 되어 나부끼며 피어오르고 조금씩 내 영혼도 끌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였다. 반세기를 살아 온 내 삶의 도형들이 나타났다가는 한삼자락에 휘말려 사라지고 또 다른 영상이 나타나고, 몽환적인 순간과 순간들이 얼마나 지났을까, 안개자락들은 덩이가 되어 다른 우주로 들어가는 깊은 관문 같았다. 주연배우가 되어 스치는 지난날의 내 모습들.

50여 년 전이다. 사람도 산천도 설기만 한 곳, 불안과 공포까지 안고 첫발을 딛던 마을 어귀 저수지 둑길이다. 남과 북을 좌청룡 우백호 삼아 안산이 둑이 되었고, 동으로는 덩치 좋은 진산을 의지한 우리 동네다. 서쪽으로는 탁 트인 들판과 유유히 흐르는 냇물이 평화롭다. 내가 이 저수지를 천사의 가슴이라 일컫는 이유는 숱한 눈물과 한을 뿌렸어도, 감당하기 버거운 나의 상처를 온전히 씻겨 주던 너른 가슴이기 때문이다. 그땐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까지 나를 애달프게 바라보던 아픈 삶의 시공간이었다.

촌스런 대구 아가씨가 말조차 소통이 매끄럽지 못해 삐거덕 거리는 모양새며, 뽕잎 따러 뒷산 뽕밭으로 가다가 똬리를 틀고 있는 뱀에 놀라 경기를 하던 꼴은 수십 년이 지나고 보니 입 꼬리를 올려준다. 그땐 지금처럼 뽕나무의 가지를 치는 것이 아니라 씨눈이 다치지 않게 이파리를 하나하나 따는 작업이었다. 많이 해본 솜씨라는 칭찬에도 두 가지 해석이 나왔다. 진짜 잘한다는 뜻인지 그냥 해본 말씀인지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교과서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누에를 만져야 할 때는 정말 말로 표현할 형용사를 찾지 못할 만큼 대단한 각오와 용기가 필요했다. 그날 밤엔 꿈에도 누에 때문에 시달렸다.

제일 어려운 나락 밭 김매기 영상이 떠오르자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가 생각났다. 벼와 피의 구분이다. 거름 빨 잘 받아 좋은 나락만 다 뽑았다고 어머님이 격노 하시던 날은 나도 참 많이 안타까웠다. 신나는 장면도 있다. 가을걷이 때 도리깨질이 제일 재미있다. 어머님과 마주 서서 쿵짝쿵짝 박자 맞출 때는 신명 많은 본능이 살아났다.

칭찬은 더 열심히 하라는 마법 같아서, 집에 아무도 없는 장날, 큰 밭 귀퉁이에 붙은 작은 밭떼기가 온통 풀숲이라 깨끗하게 뽑아냈다. 개운하고 뿌듯해서 들뜬 기분이었다. 해거름에 할아버지께서 뒷골 밭에 가시더니 황급히 내려오셔서 누가 더덕을 홀라당 다 뽑아버렸다고 난리가 나셨다. 기다리고 있던 칭찬은 천둥번개를 동반한 벼락으로 변해버렸다. 어쩐지 풀 뽑으면서 풀의 향이 참 좋다고 느꼈지. 지금이야 안개자락을 통해 나타난 이런 영상들이 미소를 짓게 하는 추억이지만 당시 새댁에겐 아주 큰 상처요 하루하루가 공포였다. 무엇보다 아직도 가슴 깊이 자리 잡은 아들딸 차별 대우는 이 저수지에 참으로 많은 눈물을 뿌렸다. 둘째 동서가 먼저 아들을 낳고 한 달 후에 내가 딸을 낳았다. 그 서러움은 차마 다 표현 할 수가 없다. 콩쥐팥쥐 동화 속에나 있을법한 사연이 현실에 버젓이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오계자 수필가
오계자 수필가

햇살이 뒷산 능선을 타고 내려오자 무대는 바뀌어 물안개가 한층 더 격렬하게 춤사위를 벌이며 안산의 솔숲으로 스며들어 사라진다. 안개가 떠나자 유난히 반짝이는 물비늘의 박수를 받으며 내 영화도 막을 내렸다.

신축 년 11월, 동살과 같이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스크린 삼아 내 삶의 영화를 본 것이다. 미움과 원망, 아픔까지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시킨 영화가 된 것은 내 영혼이 그만큼 평화로워졌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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