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윤희 수필가

물길 따라 구부렁구부렁 백곡저수지를 거슬러 오른다. 고향 가는 길이다. 장맛비 머금은 모감주나무가 노랗게 웃고 서있다. 한여름 뙤약볕을 고스란히 안고 정수리에 꽃을 피운 모감주, 한여름 논 가운데서 피살이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삼복엔 그늘이나 드리우며 쉬엄쉬엄 살아도 될 법한데 굳이 머리벗겨질 이 더위에 꽃을 피우느라 저리 애를 쓰나 안쓰러움이 스친다. 그래도 온통 초록 일색에서 노란 꽃을 보니 반갑고 미덥다. 차창 밖으로 눈길을 주며 저수지에 수몰된 아버지의 일터를 지난다.

면 소재지 돌고개를 넘어 10여 분 남짓 더 달려 양백리로 들어선다. 양백리는 진천군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백곡면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전해오는 말로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고려의 충신들이 세상을 등지고 찾아든 곳이라 한다. 깨끗한 선비들이 사는 곳이란 의미도 지녔다. 아래쪽 마을은 하백, 윗마을은 상백이다. 상백은 청학동이라는 어엿한 자연마을을 품고 있다. 학이 살았다는 마을이다.

상백경로당 앞에 이르면 이름만큼이나 풍치가 고요하고 평화롭다. 집집으로 이어진 돌담이 정겹다. 절로 미소가 머금어진다. 정이 넘치고 여유롭다. 동네 어귀부터 꽃으로 환하게 길을 밝히고 있다. 이장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동네를 가꾸는 덕분이다.

'우리 마을은 내 손으로 가꾸고 지킨다'는 깨어 있는 의식이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대부분이 연령은 노인이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젊은이다. 부지런하다. 새벽부터 들일하고 틈내어 배움에도 열중이다. 일주일 내내 할 일이 빼곡하게 짜여 있다.

그중, 나와 만나는 한글 학습자들은 학구파다. 그들의 표정은 다양하고 풍부하다. 툭툭 튀어나오는 말투에 진리가 스며 있고, 시가 들어 있다. 깜짝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저들이 제때 제대로 교육을 받았더라면…. 안타까운 마음이다.

"땅이나 파라면 잘 팔까? 글씨는 자꾸 삐뚤어져" "새들배들 하던 곡식이 비가 오니 깨끼춤을 추네" "등허리에 콩 볶게 바삐 사느라 배울 여유가 있었남?" "금방 한 것도 금방 잊어버리니 뭔 공부를 햐"

푸념을 하면서도 공부하는 날은 어김없이 굽은 허리를 이끌고 보행 보조기를 밀고 경로당을 들어선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밑으로 다 빠져나가지만 그래도 콩나물은 자란다는 이치를 아는 걸 게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같은 소리를 내도 뜻에 따라 받침이 다른 글자, 쓸 때와 읽을 때 다른 글자를 설명하려니 미안하기 짝이 없다. 얼마나 복잡하고 헷갈릴까.

숫처녀같이 순수한 어른들에게 숯불구이를 숟가락으로 먹기를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도 수업 마치는 시간 맞춰 옥수수를 쪄 주고, 푸성귀 봉다리 쿡 찔러주는 손길에선 친정엄마의 정이 뚝뚝 묻어난다. 맨입으로 보내는 적이 없다. 사람 사는 이치를 배우고 오는 시간이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