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태양이 산을 넘어 먼 길을 떠나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황혼이 흐릿해지고 사위를 분별할 만큼의 흐릿한 잿빛이 내 의식 저 아래의 아릿한 슬픔을 불러내고 있다. 서서히 물러나는 잔명(殘明)을 밤의 어둠이 파고들다 온전히 밀어내고 어둠의 세상으로 만들어간다.

이제 도시에 이러한 여정은 없다. 일에 중독된 이들은 어둠이 밀려와도 인공 태양을 여기저기 띄운다. 그 일이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인지, 인류를 어려움에 빠뜨리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인지 모르고 마음에 두지 않는다. 낮과 밤이 자리를 바꾸고 달과 별들이 나타나 사람들과 친구하고 위로도 해야 하는데 그 자리 넘겨주기를 거부하는 게다.

수수만년 다가오던 달과 별들이 인공 태양과 고층 건물에 가려 빛을 잃은 채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서럽고 마음 아픈 이들이 은은한 위로와 격려를 받지 못해 다시 일어설 힘이 고이지 않는다. 어둠을 몰아냈다지만 사실은 휴식의 어둠을 빼앗긴 것을 모르고 있다. 어둠 속에 펼쳐지는 또 다른 세계를 잃어버리고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어둠은 우리의 미추(美醜)를 가린다. 밝음 속 경쟁에 어둠의 장막이 드리워 다툼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자신을 돌아보고 의미를 궁구하던 시간적 공간이 사라졌다. 혹사당하는 시각(視覺)이 휴식할 시간이 줄어들었다. 태초부터 이어 오던 균형 감각이 무너져 멈추지 못하는 자전거처럼 앞으로만 굴러간다.

산업 혁명기를 다시 맞듯 밤을 낮으로 바꿔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을 자본주의의 유토피아로 가는 지름길로 여기는 듯하다. 태양이 폭력이라면 달과 별들은 위로다. 긴 세월 친했던 동무들을 잃은 달과 별들은 날마다 희망과 기대 속에 도시의 그늘진 곳들을 찾으려 하지만 고층건물과 인공 태양 때문에 공중에서 길을 잃는다. 사연도 모르고 동무 잃고 위로와 애무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마저 더 이상 그들을 기다리거나 찾지 않는다.

과학이란 지식으로 무장한 소수 국가가 탐욕 가득한 눈으로 달과 별들마저 차지하려 싸우고 있다. 먼저 달려가 깃발을 꽂고 이름을 지으면 주인이 될 것 같았다. 상상하기 어려운 시간과 재력을 쏟아 부어 달과 별들을 사유화하려는 이들을 보며 달과 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달과 별들이 찾아오는 한적한 곳에 산다. 밤은 그들의 것이다. 동무해 주는 달과 별들의 위로와 애무를 받고 풀과 나무와 강아지에게까지 달과 별들의 위로와 애무를 나누고 산다.

일상을 변혁하고 운명을 개척하라 한다. 더 이상 일상은 일상이 아니고 운명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물의 영장 아닌 만물의 파괴자로 복이 재앙이 되고 발전이 황폐가 될 것 같아 불안하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밝음이 어둠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가듯 태양이 멀어지면 은은한 달빛과 별빛을 맞이할 순 없을까? 달과 별들이 찾아오는 그곳이 내 삶의 자리면 좋겠다. 편함에 길든 이들이 그것들을 버릴 수 있으랴.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좋으리라.

태양이 멀리로 갈 길을 서둘면 도시 변두리로 달과 별들을 만나러 가자. 그마저 할 수 없다면 고층건물 꼭대기에 올라 그들을 맞이하고 만세를 부르라. 그동안 세상에 속았음을 털어놓고 우리 잘못임을 고백하자. 밤을 밝혔던 인공 태양을 끄고 일상은 일상이 되고 운명은 운명이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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