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감 확림. 공동체의식 고취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례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오』

3.1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청원의 인물, 의암 손병희선생의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의암문화축제」를 개최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관내 지역사회단체들은 청원의 역사적 인물인 의암 손병희선생의 독립정신을 주제로 한 문화축제를 개최하여 지역사회에 대한 소속감 확립과 공동체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 의암문화축제 개최 여론이 수면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올들어 12회를 맞는 청원문화제를 비롯 옥산사거리축제등 7개의 지역축제가 청원군을 대표할 수 있는 축제로 자리매김하기에는 다소 미약하다는 지적에서 비롯되고 있다.

특히 청원지역은 충북의 중심도시인 청주시를 둘러싸고 있어서 청주시와 동일한 생활권을 형성하는 장점도 있지만 소속집단에 대한 자긍심이나 자부심이 점점 희박해져 상대적으로 이탈감이 커지기 때문에 축제를 통한 군민결속이 요구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때 청원군민이 주체가 되어 청원군의 대표적 인물인 의암 손병희 선생의 업적을 축제로 승화시키고, 축제를 통해 동질성을 유도하고 「살맛나는 청원 만들기」를 기반으로 정신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소 적극적인 뜻이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청원군의 지역 축제 현항을 보면 청원군이 주최하는 「군민의 날 및 청원문화제」를 비롯 「옥산사거리 문화축제」, 「허브대축제」, 「딸기축제」, 「쌀안축제」, 「약수축제」등이 있으며, 충북도와 청주시와 함께 개최하는 「대청호국제환경미술제」, 「세계태권도문화관광축제」등 9개의 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그러나 타 자치단체 축제와 차별화되고 지역특색을 살린 독창성 있는 축제는 약수축제를 제외하고는 지역의 대표성을 살릴수 없다는 것이 각계각층의 전반적인 시각이다.

따라서 주민들은 자주독립정신를 바탕으로 하는 「의암문화축제」를 개최하여 이를 관광상품화해 지역의 역사성과 인근의 문화유산에 대한 정통성을 창조적으로 통합하여 「청원의 것」으로 만들어 가자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서 출생하여 청년시절 한때 서자(庶子)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인한 방황의 세월을 보내다가 1882년 동학에 입문하였다.
의암의 어릴때 이름은 응구 또는 규동이라 했으며, 자라서 병희로 불렸고, 아호는 소소이며, 의암이란 도호는 의암이 36세 되던해 천도교 교조인 최시형 선생에게 받았다.

의암은 동학의 광제창생, 보국안민이라는 창교 정신에서 자기의 이념적 행로를 발견하고, 22세 되던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수도자로서의 길을 걷게 됐다.

의암은 입교 2년만에 교주 최시형을 만나게 되었으며 최시형은 의암의 인격이 비범함을 보고 의암을 수제자로 삼았다.

의암은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 3세 교주에 취임한뒤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최린, 권동진, 오세창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해 나갔다. 1919년 최남선, 송진우와의 제휴 및 기독교, 불교 등 각 종교계와도 제휴하므로써 2월 중순쯤에는 학생층까지 합류시킨 3.1 독립만세운동 추진을 준비했다.

독립만세운동의 방향은 최린의 결의대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에 두고, 이 3대원칙을 근간으로 민족정기의 발원을 천명한 독립선언서가 최남선에게 위촉되어 기초 작성되었다.

손병희 선생을 필두로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의 민족대표들이 서명함으로서 모든 준비는 갖추어진 셈이다.

드디어 1919년 기미년 3월 1일 정오,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의 첫 함성과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만세의 절규는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에 파급됐다.

이후 수개월에 걸쳐 전개된 민족의 피 어린 독립만세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이렇게 뿌려진 독립운동은 멀리 해외 망명 지사의 꾸준한 독립운동으로 연장되었다.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그해 10월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22년 5월 19일 당시 62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선생의 생애는 한국 근대사의 큰 줄기를 이루어 냈다. 그것은 곧 한국민족의 행로를 제시하고 한국근대사를 이끌어가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때로는 혁명가로, 때로는 사상가요, 민족의 지도자로 손병희선생은 늘 앞장서 걸었다.
선생의 유해는 삼각산 동쪽 우이동 언덕에 안장되었고,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청원군은 제 81주년 3.1절을 맞아 선생이 태어난 북이면 금암리 소재 생가를 복원하고 의암영당을 건립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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