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곽학회, 학술대회 청주서 열려

▲ 충주산성(일명 남산성) 연못 부근 모습으로, 고려 승장 김윤후는 이 성에서 청야입보의 작전개념으로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충주 백성들은 들을 청소하고 이 성으로 들어가 70여일간 버틴 끝에 승리했다.
산성(山城) 축조 문화가 우리나라 고대~중세 산림자원을 보호하는데 결정적인 기여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산성이 갖고 있었던 청야입보(淸野立保) 작전개념 때문에 중국과 달리 '도성이 함락돼도 국가는 멸망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국성곽학회가 주최한 '한반도 중부내륙 옛 산성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학술대회'가 지난 18~19일 청주고인쇄박물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한국전통문화학교 허권, 충북대 차용걸, 충북문화재연구원 노병식, 중원문화재연구원 조순흠, 충주대 백종오, 청주대 박상일, 동아대 이동주 씨 등이 나서, 중원문화권 4개 산성과 성곽문화에 대한 나름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핵심적인 사료로 여겨지고 있는 중원문화권 4개 산성은 상당산성, 삼년산성, 충주산성(일명 남산성), 덕주산성 등을 일컫고 있다.

이중 충북대 차 교수는 4개 산성 외에 한국의 성곽이 갖고 있는 문화사적인 특징과 의미를 총괄적으로 언급, 또 다른 방향을 관심을 끌었다.

그에 따르면 중국의 성곽들과 비교할 경우 한국의 산성들은 ▶돌이 주재료로 사용했고 ▶청야입보의 개념을 지녔으며 ▶민(民)을 위해 성곽을 축조한 민보용(民保用) 성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밖에 불필요한 요소는 최대한 억제, 철저히 경제적인 법칙을 추구했다.

차 교수는 첫번째에 대해 "중국의 성은 토성에서 시작해 전축성(벽돌성·예 만리장성)으로 발전했으나 한국의 성곽들은 토성으로 시작해 석성(돌성)으로 진화했다"며 만약 한국의 성곽들이 전축성으로 발전했다면 가마에서 벽돌을 만들었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산림훼손이 전국적으로 엄청나게 진행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두번째 청야입보 개념에 대해서는 "중국의 역사는 도성이 함락됐을 경우 곧바로 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러나 한국의 고대와 중세 산성들은 청야입보 개념으로 축조됐기 때문에 외적들의 작전반경과 동선이 크게 위축, 결과적으로 국가를 보존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청야입보는 말 그대로 적의 외침이 있을 경우 '들을 비우고 성에 들어가 농성한다'는 뜻으로, 고려 때의 충주산성 전투가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 당시 몽골군은 고려를 침입, 충주산성을 집중 공격했으나 승장 김윤후의 청야입보 작전에 따라 70여일간 버틴 끝에 승리한 바 있다.

차 교수는 세번째 민보용 성격에 대해서는 "중국의 성곽들과 달리 이 부분에서는 민본주의 사상도 읽을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잘 살펴보면 한국이 성곽들은 그 축조의 주체가 民이었고, 또 民을 위해 民의 노동력이 동원됐으며, 이밖에 이를 관리하는 주체 역시 民이었다"며 "이처럼 대부분의 산성들이 民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규모가 작은 편"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한국의 산성들은 성문, 배수장치, 치성, 여장 등 필요 불가결한 요소만 선택적으로 갖추고 있을 뿐 그외 장식적인 시설은 모두 생략돼 있다.

차 교수는 이에대해서는 "축조 과정에서 노동력을 최대한 절약,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기 위한 경제법칙을 읽을 수 있다"며 "이 역시 민에 대한 배려심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고 밝혔다. / 조혁연 chohy@jbnews.com

■ 용어 설명

☞치성 : 성벽이 일자(一字) 형일 경우 적이 접근하는 것을 놓칠 수 있다. 그러나 일자형 성에 ㅁ자형의 돌출된 성곽을 만들면 적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치성 위에는 포루도 위치했다.

☞여장 : 성체 위에 설치한 낮은 담장을 의미한다. 여장에는 멀리 볼 수 있는 '원총안'(주로 凹형)과 가까이 접근한 적을 관찰하는 '근총안'이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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