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 3세기 무렵에는 충주까지 진출한 듯

교과서 밖의 충북역사2

충청권 학교의 교가에는 마한(馬韓)이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 만큼 마한은 충청도민들에게 역사의 시원성으로 다가오는 이름이다.

그러나 "마한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위치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 "글쎄 충청도~전라도 일대 아닌가"라고 답변하는 사람이 많으나 구체성은 결여된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한의 동쪽 경계가 어디였냐"를 물으면 더 더욱 어려운 질문이 된다. 이를 규명할 수 있는 발굴조사가 지난 2004년 충주 금릉동에서 있었다.

마형대구 ■ 모두 210기의 무덤 존재= 당시 충북대 박물관팀은 금릉동 일대(현 충주 세무서 자리)에 대한 발굴조사 활동을 벌여 210기의 무덤 유구에서 원저단경호(둥근바닥 항아리) 등 토기류, 목관묘, 환두대도(둥근머리 큰칼), 마형대구(말모양 혁대버클), 철모, 철촉, 재갈 등 층위·시대별로 800여점의 유물을 발굴한 바 있다.이와 관련해 충북대 발굴팀은 출토된 유물에 근거, "3세기 충주에 마한 소국의 하나가 존재했고, 이는 마한의 동쪽끝 경계로 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당시 발굴팀은 이의 근거로 원저단경호, 마형대구 등을 제시했다. 밑이 둥글고 목이 짧은 3세기 무렵의 원저단경호는 과거 청주 서부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 바 있다. 마형대구 역시 청주 서부지역에서 다량으로 발굴된 바 있다.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마한(주로 목지국 지칭)의 세력권은 경기~천안~청주를 주축으로 하면서 그 동쪽 경계는 충주에까지 이르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기마인물형 토기
■ 무덤 위로 갈수록 대형화 위계 뚜렷= 한국 고고학계는 그 동안 3세기 무렵 충주지역에 대해 ▶예족(동예)과 교류하며 동화됐던 모습이 보이고 ▶그 이후에는 적석총 문화권(고구려계)에 편입됐던 것으로 봐왔다. 그러나 당시 발굴로 이 설이 일거에 무너지게 됐다.

이밖에 당시 발굴에서는 목관묘 무덤들이 정상으로 갈수록 대형화된 모습을 보이는 등 이른바 권력 위계문화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최고 지배자용으로 추정되는 환두대도도 출토됐다.

이는 당시 충주 지역에 초기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무사집단이 존재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 54개 소국중 고원국 가능성 높아= 그러나 남는 궁금증이 있다. 진수(陳壽)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마한에 대해 '54개 소국이 존재했으며 큰 나라는 1만여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가로 모두 합하면 10여만 호(戶)가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54개 소국은 감해국, 감해비리국, 건마국, 고랍국, 고리국, 고비리국, 고원국, 고탄자국, 고포국, 구로국, 구사오단국, 구소국, 구해국, , 내비리국, 노람국, 대석삭국, 막로국, 만로국, 모로비리국, 모수국, 목지국, 소위건국 등을 말한다.

그렇다면 위 54개 소국 중 어느 나라가 충주에 위치했을까. 추정만 있을 뿐 아직 학문적으로는 검증되지 않고 있다.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성정용 교수는 지난해 발간된 보고서에서 "발굴된 유물을 기초로 했을 때 3세기 무렵 충주에는 소위건국(素謂乾國), 고원국(古爰國), 막로국(莫盧國) 중 하나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바 있다.

지금까지 3개 소국 중 서위건국과 막로국은 충남 일대, 고원국은 경기도 또는 충청도 일대로 비정된다는 견해가 우세했었다.

환두대두
■ 삼국지 위서동이전 내용 그대로 입증= 한편 당시 조사에서는 낙랑과의 교류내지 낙랑유민 유입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구인 목관묘가 다수 발굴돼 또 다른 방향의 관심을 끈 바 있다.

성 교수는 이에 대해 "당시 낙랑은 합장묘를 많이 썼는데 금릉동에서도 합장묘가 많이 발굴됐다"며 "다만 충주에 유입된 후 목곽+목관이 합쳐진 '목곽계 목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목곽계 목관'은 목곽을 두른 후 그 안에 다시 나무관을 쓴 무덤 양식을 의미하고 있다.

이밖에 삼국지 위서동이전 한조(韓條)에는 '韓滅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표현이 나오고 있다. 의역하면 '한예가 강해져서, 낙랑은 잘 통제를 못했다. 때문에 낙랑유민 상당수가 한국으로 유입됐다' 정도가 된다.

이때의 '韓國'은 마한을 가리킨다. 금릉동 목곽계 목관 등장은 삼국지 동이전 내용을 정확히 고증하고 있다.

성 교수는 "낙랑유민이 들어올 때 묘제 기술자로 함께 이동해 온 것으로 보인다"며 "금릉동에서 철기류 유물이 유난히 많이 나온 것은 충주 칠금동 제철지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 조혁연

도움말 : 성정용 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우종윤 충북대 박물관 학예실장.

■ 마한을 구성한 종족은 누구

지금까지 삼한 이동설과 선주(先住) 토착집단의 점진적인 발전설 등 2가지가 존재하고 있다. 전자는 마한족이라는 별개의 종족이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이주·정착하여 성립됐다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반면 후자는 BC 3,2세기 세형동검(일명 좁은놋단검) 문화를 배경으로 한 다수의 정치집단이 존재했고, 이들이 충남·전라 지역에 밀도있게 거주하면서 마한 소국을 형성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느 설이 됐든 충주는 마한의 중심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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