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망이산성 봉수대, 가장 중요한 기능했다

중원문화재연구원(원장 차용걸·충북대 교수) 조사팀이 지난 8월 청주 것대산(486m) 봉수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봉수대 아궁이 유구 3개 ▶건물지 1곳 ▶방화벽 유구 등● 흔적을 확인됐다.

청주시는 이를 바탕으로 1억4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조선시대의 원형대로 복원, 역사와 교육 공간으로 활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상당수 사람들이 청주 것대산 봉수대가 충북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 때는 음성 망이산성 봉수대가 가장 중요한 기능을 했다.

▲ 조선시대 충북에서는 음성 망이산성 봉수대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청주 것대산 봉수대(사진)는 생각한 것 만큼 중요한 봉수대는 아니었다.
◆ 조선시대 봉수제도= 우리나라 봉수제도는 고려는 물론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거의 대부분 유실됐고 현존하는 것은 조선시대 것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시대 봉수제도는 두만강의 함북, 평안북도 신의주 부근, 부산해안 일대, 목포 일대 남해안 등 4곳에서 출발해 그 신호가 서울에 닿도록 했다. 따라서 이를 그림으로 그리면 <X자> 모양이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봉수루트는 1개 루트가 아닌, 주봉과 간봉 등 2가지가 존재했다. 주봉(또는 직봉)은 말 그대로 정식 루트를 말한다. 반면 간봉은 주봉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이를 비상적으로 이용하는 루트를 의미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같은 봉수대가 연대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략 500~700 정도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충북의 봉수대 현황= 조선시대 충청권에는 현재까지 충북 23개소, 충남 30개소 등 대략 50여개소의 봉수대가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중 문헌상 고증이 가능하고 또 유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봉수대로는 박달라산, 망이산성, 오현, 주정산, 마골치 등 5개가 있다.

박달라산 봉수대는 충북도내 최남단이 영동군 용산면 한산리와 율리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주요 기능은 추풍령로의 영동 소이산 봉수대에서 보낸 신호를 받아 이를 옥천 월이산 봉수대에 전달했다.

봉수대를 감싸고 있는 석축은 내외 협축으로 쌓아 올린 남서-북동 방향의 긴 타원형으로, 보존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망이산성 봉수대는 행정구역상 충북 음성군과 경기도 안성시 경계의 해발 472m에 위치하고 있다. 봉수대가 산성 최정상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전망이 좋고, 보존 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오현봉수는 제천시 수산면 오티리와 한수면 독곡리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420m에 위치하고 있다. 기능은 죽령로의 단양 소이산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충주 심항봉수로 신호를 전달했다. 봉수대 석축은 남북 장축의 타원형으로, 유적지 내에는 산신각도 위치하고 있다.

주정산 봉수대는 충주시 수안보면 온천리와 괴산문 장연면 추점리 경계의 해발 440m에 위치하고 있다. 기능은 계립령로의 충주 마골치 봉수대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충주 대림산성으로 신호를 전달했다.

마골치 봉수대는 충주시 수안보면 사문리와 미륵리 경계의 지릅재 남쪽 640m 산에 위치하고 있다. 기능은 문경 탄항 봉수대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이를 충주 주정산 봉수대에 전달했다.

◆ 가장 중요했던 봉수대는= 조선시대 충북에는 3개의 봉수 루트가 통과했다. 이중 부산에서 경상도를 거쳐 올라 온 주봉(제 2로)은 죽령-단양-충주 가섭산 음성 삼성면 망이산성을 거쳐 한양으로 올라갔다.

나머지 2개 루트는 간봉이었다. 충주쪽 간봉은 하늘재-대림산성-가섭산을 거쳐 역시 음성 망이산성으로 빠졌다. 또 다른 간봉은 추풍령으로 들어와 영동, 옥천, 문의 소이산, 청주 것대산, 진천 소을산을 거쳐 역시 진천 망이산성 봉수대로 빠지도록 했다.

이상에서 보듯 조선시대 때 충북을 통과하는 모든 봉수 정보는 음성 망이산성을 거치도록 설계돼 있었다. 여기서 봉수 정보가 모야져 경기도 봉수대를 거쳐 궁궐로 전달됐다. 이른바 조선시대 봉수노선 중 제 2거 직봉의 내지봉수에 해당하고 있다.

이같은 중요성 때문에 조선시대 음성 망이산성 봉수대는 망이산봉화, 망이성봉수, 망이산봉수, 마이산봉대, 망이산성볼수 등 여러 명칭으로 호칭되기도 했다.

현재 망이산성 8부 능선 쯤에는 매산사라는 사찰이 위치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도로가 포장돼 있고, 사찰 뒤로는 등산로가 나있어 쉽게 망이산성 봉수대까지 도달할 수 있다. / 조혁연



도움말 : 차용걸 충북대교수,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사



# 봉수대 아궁이는 왜 5개

봉수할 때 '봉'과 '수' 자가 무슨 뜻을 지녔는지 알아봐야 한다. 이때의 봉(烽)은 횃불, 수(燧)는 연기를 뜻하고 있다. 당시 조선시대에는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규칙이 있었다. 평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개, 적이 국경을 침범하면 4개, 적과 아군이 싸우기 시작하면 5개의 봉수를 올렸다. 따라서 전국의 봉수대는 모두 5개의 아궁이를 갖고 있어야 했다.

# 봉수는 효과가 있었을까

조선시대 봉수는 기상 조건만 좋으면 시속 100km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이는 부산에서 봉수 신호를 올리면 4~5시간이면 그 신호가 서울에 도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서울로 올라온 봉수정보는 병조가 이를 분석하여 승정원(지금의 청와대)에 보고하는 시스템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봉수제도는 효과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기록을 보면, 임진왜란 때 왜구가 동래성에 쳐들어 왔는데도 서울에는 위급함을 알리는 신호가 전달되지 않았다.

평상시를 의미하는 1개 봉수만 올랐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왜군들은 봉수대의 정보전달 기능을 두려워했다. 따라서 내륙으로 진군을 하면서 전국 봉수대를 닥치는대로 파괴했다.

효용성이 크게 떨어지자 조선 고종 때 사실상 완전히 용도폐기됐다. 이때는 구식 전화가 궁궐에 막 선보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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