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불교 국토화 염원 등 다양한 해석

교과서 밖의 충북역사2

지명 연구가나 역사가들은 땅이름을 가리켜 '역사의 지문(指紋)'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 만큼 땅이름에는 역사성이 농익게 담겨져 있다.

이와 관련, 지명 연구가들은 우리나라 땅이름의 작명 특징으로 ▶표기의 이중성 ▶두 음절 땅이름이 유난히 많은 점 ▶변천성 ▶종교 관련성 ▶지형 관련성 ▶풍수사상 영향 등 대충 여섯 가지 정도를 거론하고 있다.

'밤나무골'이 '율곡'(栗谷), '진고개'가 '이현'(泥峴)으로 변한 경우는 첫번째 사례, '달구벌'(達句伐)이 '대구'(大邱)로 변한 경우는 두번째, 한양이 한성, 경성을 거쳐 지금의 서울이 된 것은 세번째 경우에 해당하고 있다.

이밖에 '금강산', '문수봉', '관음굴'과 같이 불교의 영향을 받은 사례는 네번째 경우, '새터'가 '신대'(新垈)로 변한 경우는 다섯번째 경우에 해당하고 있다. 풍수영향을 받은 지명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전국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충북의 지명에서도 이같은 사례가 다수 관찰되고 있다. 특히 충북의 대동맥인 청주~충주간 36번 국도 주변에서 불교식 산이름이 집중적으로 산재하고 있다. 충주 계명산, 음성 가엽산, 증평 미타산 등이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

◆ 충주 계명산

충주시 안림동 뒤쪽에 위치한 이 산은 지금은 '충주의 여명을 연다'는 뜻의 계명산(鷄明山·해발 774m)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1958년 개명되기 전까지 계족산(鷄足山)으로 불렸다.

▲ 학계에서는 충주 계명산(구 계족산), 음성 가엽산, 증평 미타산 등의 산이름을 불교식 지명으로 보고 있다. 사진은 충주 계명산. 계족산의 문자적인 의미는 '닭발을 닮은 산'이라는 뜻으로, 충주시는 어감이 안좋다는 이유로 이를 계명산으로 개명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원래 이름 '계족산'을 지형을 반영된 것이 아닌, 불교식 지명으로 보고 있다.불교경전에는 석가모니 수제자 가섭이 계족산으로 들어가 입적했고, 이때 갈라져 있던 두 산이 합쳐졌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그리고 미륵불이 다시 먼훗날 이 땅에 출현할 때 합쳐졌던 두 산이 다시 둘로 갈라질 것이라는 내용도 나오고 있다.◆ 음성 가엽산음성 가엽산(迦葉山·710m)은 음성읍과 충주시 신니면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 관련, 두 지자체 주민들은 산이름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신니면 주민들은 한자 표기 그대로 '가엽산'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음성지역 주민들은 '가섭산'이 맞다고 말하고 있다.불교 범어식 표현대로 하면 이 산은 '가섭산'으로 부르는 것이 맞아 보인다. 불교 범어는 그것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표기와 읽기가 서로 다른 경우가 자주 등장한다. 가령 절의 또 다른 이름인 '도량'은 한자로는 '道場'으로 적지만 읽기는 '도량'으로 읽는 경우와 같다. 이같은 사례는 통도사 뒷산을 '靈鷲山'(영취산·1059m)으로 쓰고 '영축산'으로 읽는 경우와 같다. 국립지리원은 이 산의 명칭을 '가엽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두 지역민의 다툼을 떠나 국립지리원 표기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물론 이때 등장하는 '迦葉'은 앞서 언급한대로 석가모니 수제자인 '가섭'을 의미하고 있다. ◆ 증평 두타산진천~증평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두타산(頭陀山·598m)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이 불교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불교 '두타행'(頭陀行)은 지금도 가장 금욕적인 수행방법으로 여겨지고 있다. 증평 두타산

이 수행 방법은 실내가 아닌 나무나 동굴에서 기거를 하고, 옷은 남이 버린 것을 기워 입으며(일명 糞掃衣ㆍ분소의), 음식도 기름진 것이 아닌 거친 것을 먹는 것 등을 말한다.

이를 가장 모범적으로 수행한 제자가 앞서 언급한 가섭으로, 그는 생전의 철저한 두타행 수행 때문에 지금도 '두타제일'(頭陀第一)로 불리우고 있다.

방향은 다소 다르지만 증평의 옛이름인 '도살현'도 불교식 지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도살'할 때의 '살'이 '보살 살'(薩) 자이기 때문이다.

◆ 현재 3가지 설 거론돼= 이처럼 충북의 등뼈에 해당하는 국도 36번 주변 산에는 불교식 이름이 다수 관찰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 이런 불교식 이름을 붙였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불교가 대중성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이다.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이 시기에 불교식 지명이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불국화 염원설, 절이름 영향설, 이데올로기 동원설 등 다양한 이론이 거론되고 있다.

첫번째 설은 당시 민중들이 미륵불의 출현을 학수고대 했고 그 결과, 산이름에도 불교식 지명이 나타나게 됐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두번째 설은 절이름이 곧바로 산이름으로 변한 사례가 많다는 점이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가령 음성 '가섭사'가 '가섭산'에 위치하는 경우가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세번째 설은 첫번째 설의 연장선에 놓여 있으면서 보다 심화된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설득력이 가장 높은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충북지역은 삼국(고구려, 신라, 백제)의 최대 세력 각축장이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전쟁의 일상화를 의미한다. 충북을 '중원'으로 칭할 때, 중원을 둘러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쟁패는 5세기 쯤부터 본격화됐다.

먼저 중원 일대를 차지한 곳은 백제였다. 이후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시작하면서 백제는 지금의 금강 이남으로 퇴각하게 된다.

금강 미호천변에 위치하는 부강 남성골산성은 이때의 역사적인 산물이다. 그러나 삼국의 막내였던 신라도 가만있지 않았다. 한때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었지만 고구려-백제가 다투는 틈을 타 보은-문의를 거쳐 청안·증평 일대를 장악했다.

백두대간을 넘어 한강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와 거꾸로 남으로 백두대간을 넘으려는 고구려, 그리고 고토를 지키려는 백제가 중원 일대에서 강렬한 파열음을 냈다. 이른바 삼국시대 150년 전쟁이다. 그렇다면 이런 추리도 가능해지고 있다.

'삼국은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격렬한 전쟁을 치뤘다. 이와 동시에 중원 지역의 민심을 얻기위해 불교라는 종교 이데올로기를 동원했다. 그 불교 이데올로기가 산이름에도 반영됐다'.

학자들은 중원지역이 다시 전쟁터로 후삼국시대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 왕건과 궁예가 자신을 후세 왕림한 미륵불로 자칭, 추종자들을 많이 끌어 모은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호족들 역시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신을 미륵불로 자칭하기도 했다.

역사 전문가들이 충주 수안보면 미륵리사지 입석불을 왕건과 당시 충주 호족인 유긍달의 합작품으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조혁연

도움말 : 장준식 충청대학 박물관장.

# 가섭

석가의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석가가 죽은 뒤 제자들의 집단을 이끌어 가는 영도자 역할을 해냄으로써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불린다. 석가의 제자가 된 후 8일만에 바른 지혜의 경지를 깨쳐 자기 옷을 벗어 석가에게 바친 후 부처가 주는 마을 밖의 쓰레기 더미에서 주워온 헌옷의 천으로 만든 분소의(糞掃衣)를 입고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

이밖에 욕심이 적고 족한 줄을 알아 항상 엄격한 계율로 두타(頭陀·금욕 22행)를 행하고 교단(敎團)의 우두머리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부처의 아낌을 받았다.

석가가 열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쿠시나가라의 천관사로 달려가 스승의 발에 예배한 후 다비의식을 집행하였다. 이어 그는 500명의 아라한들을 모아 스스로 그 우두머리가 되어, 아난과 우바리로 하여금 경과 율을 결집토록 하였다. 선가에서는 그를 부법장(付法藏) 제1조(祖)로 높이 받들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키워드

#연재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