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백제 유물 출토 … 그 하나 하나가 미스터리

인류가 만든 용기(用器)는 토기, 도기, 자기 순으로 발전했다. 이중 토기는 점토 재료로 형을 만든 후 이를 1천도 미만의 들고 불로 구운 것을 말한다.

흙을 구은 것이기 때문에 강도가 약하고 두드릴 때 탁음이 난다. 또 다공질(多孔質)이기 때문에 저장력이 크게 떨어지는 편이다.

▲ 청주 신봉동고군분에서 출토된 파배(손잡이잔)의 용량은 큰 것은 무려 2천400㎖가 되고 있다. 이는 500㎖ 생맥주보다 5배 정도 큰 용량이다. 따라서 일단 도량형을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시대 중 백제토기는 원삼국시대의 두드림무늬토기(일명 타날문 토기)의 제작 전통 위에 중국 용기문화가 새롭게 가세하면서 나름의 전통을 확립하게 된다. 이후 백제토기는 짧은목항아리(단경호), 깊은바(심발형토기), 긴항아리(장란형토기), 곧은목항아리(직구단경호), 손잡이잔(파배), 세발토기(三足土器) 등의 기형을 생산하며 대중화의 길로 접어든다. ◆ 십진법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의문= 충북대 발굴팀은 지난 1982년부터 2003년까지 총 6차례에 걸쳐 신봉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일대에서는 석실분, 토광묘, 토기류, 철기류 등 다양하면서도 매우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됐다. 시기는 5세기 전후로, 이 때는 '한성 백제시대'에 해당한다.당시 발굴된 토기류 중에는 한쪽 또는 양쪽 모두에 손잡이가 달린 '파배'도 존재했다. 그러나 단순하게만 보이는 이 토기잔이 보기보다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우리가 알고 있는 '잔'은 물 등 액체류를 마시는데 주로 사용된다. 지금의 '커피잔'이 대표적인 잔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그러나 신봉동에서 출토된 파배는 액체를 마시기에는 너무 큰 모습을 하고 있다. 보통의 커피잔인 30~60㎖의 용적량을 지니고 있는데 비해, 신봉동 파배는 600㎖와 2천400㎖ 안팎의 파배가 가장 많이 출토됐다. 용적량이 크게는 4배 가까이 차이가 나고 있다.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 출토된 무기와 무구류를 중심으로 복원한 당시 군사들과 말의 모습이다.
파배가 출토된 지형을 현미경 식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파배는 신봉동 야산중 능선 아래쪽보다 주능선상(해발 57m 이상)에서 주로 출토됐고, 또 무덤 10개중 1개꼴로 나왔다.

이는 신봉동 파배가 단순한 식기(食器) 용도는 아닌, 어떤 희소적인 가치를 지닌 기종(器種)임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발굴팀은 이를 도량형(度量形) 용기로 규정했다.

학자들은 그 근거로 ▶식기로 보기에는 너무 크고 ▶용적이 600㎖, 2400㎖ 식으로 어느정도 일정 비율로 떨어지고 있으며 ▶이밖에 파배의 상부에 '돌대'(가로선)가 존재하는 점을 제시했다.

이를 들어 지역학자들은 당시 신봉동 거주자들이 600㎖를 '1되'(升), 그리고 2천400㎖는 '1말'(斗)로 정한 것으로 보았다. 이같은 해석은 지금까지 정설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 일부에서는 조세 징수용 추정= 그러나 이같은 성과에도 불구, 파배를 둘러싼 의문점은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우리가 아는 도량형은 곡물 등 어떤 물건의 양이나 무게를 재는데 주로 쓰인다. 따라서 정확성, 통일성을 생명으로 하고 있다.

그래야 '너' 와 '나'의 거래에 있어 믿고 사고 팔 수 있는 신용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신봉동 파배는 도량형인 점은 분명해 보이나 정확성, 통일성에서는 들쭉날뚝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의문점의 초점은 ▶왜 10진법이 적용되지 않았는가 ▶과연 잔의 외부 가로선을 보고 물건 양을 정확히 잴 수 있는가 ▶당시 기술로 과연 똑같은 '되'나 '말'을 제작할 수 있었는가 ▶대형 파배가 백제 전국토가 아닌 왜 청주에서만 나오는가 등에 모아지고 있다.

이같은 의문점 때문에 일부에서는 신봉동 파배를 "도량형은 맞으나 물물거래가 아닌 조세 징수용으로 쓴 것이 아닌가"라는 견해도 등장해 있다.

조세징수는 '너'와 '나'의 물물거래가 아니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인 통일성을 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 설은 추정일 뿐 정설의 위치는 아직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 파배가 전시돼 있는 신봉동 백제유물전시관은 또 하나의 의미있는 발굴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바로 당시 출토물을 기초로 복원한 말(馬)이다.

◆ 갑옷입은 말은 지금의 '탱크'= 우리나라 고대 무점은 '墳'(분), '墓'(묘), '塚'(총)으로 분류된다. 당시에는 봉분이 있는 무덤은 '墓', 봉분이 없는 것은 '墳' 그리고 사후의식이 크게 치뤄진 무덤은 '塚'으로 불렀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 철갑을 입은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유물전시관 말은 철갑을 입지 않았다.

갑옷을 입은 말은 지금으로 치면 '탱크'에 해당한다. 전투가 시작되면 적진 깊숙히 들어가 대열을 흐트러 놓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는 만주벌판 등 평야지 전투에서만 가능했다.

비탈진 산성(山城) 전투에서는 철갑을 입은 말이 거의 필요하지 않다. 말의 기동력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군사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같이 산이 많은 지형에서는 탱크가 크게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따라서 백제유물전시관에 '철갑을 입지 않은 말'이 전시돼 있는 것은 백제시대 청주지역에서는 산성전투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발굴 당시 무덤 위치도 여러가지 고고학적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통상의 고분은 밀집도가 높아도 그 수가 수십여기를 넘지 않는다. 또 남성과 여성이 혼재 형식으로 매장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신봉동 백제 고분군은 이것과는 반대되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이와 관련 지역 고고학계에서는 신봉동 고분을 '백제 군인들의 집단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료적 근거는 화살촉, 창, 칼 등 출토유물 대부분이 전쟁과 관련되어 있는데 비해 방추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방추는 직물 직조와 관련된 유물로, 주로 여성 무덤에서 발견되고 있다.

매장자의 신분계급은 무덤의 위치에서 바로 읽혀지고 있다. 고지대나 산능선에서는 주로 돌방무덤(석실분)이나 대형 토광묘, 저지대에서는 규모가 작은 일반 토광묘가 주로 발견됐다. 망자의 생전 신분ㆍ계급이 사후에도 반영된 셈이다.

▲ 발굴 장소 인근에 건립된 청주 백제유물전시관 모습.
◆ 부모산성이 '센터' 역할했을 가능성= 그래도 남아 있는 의문은 또 있다. 왜 청주 여러 곳의 구릉중 하필 신봉동 일대에 집단고분이 존재하느냐 점이다. 이 부분은 당시 청주의 중심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지금은 서부지역이 많이 개발됐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우암산이 있는 '무심천 동쪽'이 청주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지역 학계에서는 부모산성에서 백제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되고 있는 점을 들어 당시 청주의 중심지를 서부지역으로 보고 있다.

이런 정황이 맞다면 당시 사람들은 청주의 변두리, 그러면서 무심천은 건너지 않는 지점에 집단무덤을 설치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신봉동 고분군에 위치하고 있는 청주 백제유물전시관은 작은 박물관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많은 미스터리성을 간직하고 있다.

/ 조혁연

도움말: 차용걸 충북대교수,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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