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영호 / 충북문인협회 회장
잠결에 딱딱 지팡이 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투박한 신발 굽 소리, 소곤소곤 들리는 정겨운 대화가 깊은 잠에 빠진 나를 깨운다.

새벽 4시만 되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소리가 분분히 들리기 시작한다. 야근을 밥 먹 듯하고, 유난히 모임이 많은 나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늘 고역이었다. 늦게 자기도 하지만, 별나게 아침잠이 많은 탓이다.

그러던 것이 등산을 하면서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다. 면역이 생겼던 것이다. 집을 나서면 길 양옆으로 고추나 배추, 파, 콩, 상추, 토란, 들깨 등 여러 가지 농작물들이 심겨져 있다. 이른 시각에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일이 한창이다. 땀 흘려 일하는 그들 모습을 보면 왠지 가슴 한구석 미안한 감이 느껴져 똑바로 그들을 바라볼 수가 없는 것은 조깅이니 산책이니 하는 용어 자체가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게다.

밭둑 가장자리엔 옥수수가 울타리처럼 둘러쳐 있다. 옥수수가 집안을 가리는 울타리라면, 울 밖 돌 두담에는 호박넝쿨이 기어가고 있다. 호박은 푸대접을 받고도 여전히 잘산다. 농부들이 일을 하다가 돌이 잡히면 아무렇게나 밭둑으로 내던져지면서 만들어진 돌 두담. 이런 곳에 호박은 살림을 차린다.

기름진 땅이 아니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밭에 정식으로 심겨진 농작물들이야 농약이며 비료를 뿌려주지마는 심겨질 때 한 줌 퇴비가 주어질 뿐 일체의 혜택도 받지 못하면서도 어느 작물 못지않게 왕성히 자라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찐해온다. 호박이야말로 현재 농민들이 처해있는 자신의 자화상이 아니던가. 언제는 우루과이라운드로 고통을 겪더니 요즘은 FTA 협상 난제 앞에 농촌의 앞날은 점점 어려워져만 가는 현실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며,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담 밖으로 밀려난 호박과 같지 않은가.

돌 두담을 지나면 사과 과수원이다. 이곳부터는 텃밭이라는 개념이 멀어진다. 심겨진지가 20여 년이 넘어 고목이 된 사과나무들이 힘겹게 팔을 늘어뜨리고 있다. 곳곳에는 스스로의 몸도 지탱치 못하는지 처진 가지를 지주목에 의존해 버티는 지경인데도 분에 넘치게 달려있는 사과.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에도 자식들을 줄줄이 달고 살았던 흥부네 같다.

과수원 길은 사색의 길이다. 거닐면서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을 생각하며 내일을 꿈꾸는 동안 온 길을 몇 번씩 되 곱아 걷게 된다. 결국 수정산 정상은 커녕 입산도하지 못하고 출근시간에 쫓겨 부랴부랴 돌아올 때가 부지기수다.

성재산 산책. 아니 수정산이라야 맞다. 내 어릴 적엔 성재산이라 불렀는데 언제 그렇게 부르게 되었는지 연유는 잘 모르겠으나 수정산이라 바꿔 부르고 있는 이 산이 나는 좋다. 밤나무와 은사시 나무숲. 그리고 병풍처럼 늘어선 소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은, 혼자 거닐기조차 아까운 생각이 들 정도이다.

멀리 산 아래 내가 사는 집이 작은 점으로 찍혀져 보인다. 내 집이라고 장만한 건 십 오년 전이다. 전세방을 전전하다가 결혼 십 년 만에야 비로소 집을 장만할 여유가 생겼다. 그때 나는 가급적 수정산 가까이에 터를 잡았으면 했다. 지대가 야간 높다고 한 아내도, 공기가 맑고 조용하다며 내 말에 군말 없이 응해 주었다. 곧 이어 분양된 택지 중 가장 넓고 위치가 좋다는 곳에다 이층 양옥으로 지었다. 택지 선택부터 설계며 시공까지 직접 관여하였으므로 내 딴에는 만족하였고 아내 역시 흡족해 하였다.

길갓집이라는 단점은 물론 있다. 시끄러운 건 물론, 도둑이 들기 쉽고 다른 집보다 먼지를 많이 탄다. 반면 처음 오는 사람들이 찾기에 용이할 뿐 아니라 주차공간이 넓고 훗날 제값을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길갓집에 사는 동안, 나는 또 아침 형 체질로 바뀌지 않았던가. 생활패턴과 함께 습관이 바뀌고, 성격 또한 달라진 것이다. 반영호 / 충북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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