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박상언 ARKO 한국지역문화지원協 사무국장·문화평론가

1997년 경기문화재단을 필두로 현재까지 모두 38곳(기초 27, 광역 11)의 공공문화재단이 운영되고 있다. 최근 3년여 동안 갑자기 두 배로 팽창했다. 공공문화재단이 어떤 존재이며, 또 무엇을 기대해서일까. '경상비만 더 든다'는 비판론과 '글쎄' 하는 회의론도 최근의 가파른 수적 팽창을 막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지방 정부와 의회, 그리고 지역 예술가들과 주민들은 공공문화재단의 목표와 사명이 어디에 있다고 알고 있을까. 상당수 지방 정부와 의회는 '선거 공약이니까', '다른 지자체도 하니까' 하면서 마지못해 동의해 가는 형국이고, 또 일부 예술가들은 재단의 진정한 역할에 대한 고민이나 합의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질 '지원금, 즉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을 두는 듯하다. 대부분 지역주민들은 재단과 자신은 무관하다고까지 한다. 그래도 재단은 자꾸 생겨난다.

정책학에서는 정책의 세 구성 요소로 정책목표, 정책수단, 정책대상을 꼽는다. 얼핏 생각하면 정책목표가 가장 중요할 것 같은데, 정작 정책대상인 국민에게는 그렇지 않다. 국민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책수단을 중시하기 마련이다.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실질적인 내용이 정책수단이다.

예를 들자. 복권기금으로 수행하는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의 정책목표는, 일차적으로는 '지역 주민들의 문화공동체 활성화' 또는 '지역 정체성 및 정주성 제고'일 테고, 최종적으로는 '지역사회 통합 및 주민 행복'쯤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목표보다 '어떤 절차를 거쳐 어느 문화원에 얼마의 지원금이 주어질까'라는 정책수단만을 주목한다. 선택·집중이냐 포괄·분배냐, 직접 지원이냐 간접 지원이냐, 사전 지원이냐 사후 지원이냐 따위는 다 수단일 뿐이다. 공공행정의 갈등은 거의 다 정책수단을 두고 일어난다.

정책목표는 의회나 단체장 등 정치인과 공무원이나 재단 직원 등 행정가의 몫으로 남는다. 따라서 정치인과 행정가는 정책대상에 대한 정책수단의 영향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정책대상의 구미에만 따를 수는 없다. 공공행정은 공정성과 형평성도 중요하지만 효율성도 반드시 갖춰야 한다. 나눠 먹기식의 기계적인 공평은 얼굴은 기린, 몸은 사슴, 다리는 코끼리가 되기 십상이다. 정책수단을 자신의 계산식에만 대입하려는 정치인이나 행정가의 입장이 서로 다른 것은 당연하다.

공공문화재단의 설립, 그리고 이미 설립된 재단의 운영을 둘러싼 비판과 회의는 흔히 재단 본연의 역할이 무시된 채 제기된다. 예술가나 문화예술단체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축제 운영이나 시설 관리 등 지자체의 일부 사무를 위탁 집행하는 것도 모두 재단의 진짜 목표나 사명이 아니다. 이들은 국민 행복이라는 최종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정상 목표, 즉 수단일 뿐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어떤 수단은 언제나 그 하위 수단의 과정상 목표이다.

이쯤 이르니 공공문화재단의 목표와 사명이 또렷해진다. 원칙적으로 예술과 문화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가치 있는 목표지만, 이를 대상으로 혈세가 쓰일 때는 상위 목표, 즉 다수 국민의 행복에 기여해야 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예술가와 문화예술단체, 정치가와 행정가는 늘 국민을 우선해야 한다.

우리는 오랜 동안 문화를, 정치, 경제, 사회와 애써 구별하면서 이들의 뒷자리에 배치했다. 학창 시절 학과목 순서 또한 그랬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 문화는, 정치, 경제, 사회를 모두 아우름은 물론 이들의 맨 앞, 또 맨 위에 자리해 있다. 예술 중심의 고급한 개념을 벗어던진 문화는 우리 가까운 주위의 생활이자 환경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세기'의 참뜻이다.

이제 공공문화재단의 목표와 사명은 예술가나 문화예술단체를 넘어 국민을 향해 설정되어야 한다. 공공문화재단의 주인은 엄연히 국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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