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공예비엔날레 부장

소낙비가 내린 이후로 해 길어지고 청산이 더욱 우거졌다. 산 넘어 흰 구름 하릴없이 흐르고 또 흐르며 초정리 대자연은 석양 노을과 함께 깊어만 갔다.

마을 사람들은 논농사 밭농사 한창이고 구릿빛 얼굴에는 스멀스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골목길마다 소달구지 바쁜 걸음 재촉하고 아낙네는 새참 머리에 이고 논두렁 밭두렁을 오고간다.

누렁이는 촐랑대고 시냇가 풀 뜯어 먹던 얼룩빼기 황소는 졸음에 겨운지 꾸뻑꾸뻑 세월만 낚는다.

노인들은 팽나무 아래에서 조근조근 얘기를 나누고 염소 떼 풀어놓고 풀밭에서 소꿉놀이하는 어린 아이들의 풍경이 느림의 미학이라 해도 좋고 서정이 뚝뚝 떨어지는 풍경화를 닮았다고 하면 또 어떤가.

그렇게 여름이 가고 귀뚜라미 처량하며 소슬한 바람으로 가득한 가을이 스르르 오던 어느 날 새벽, 단잠을 깨우는 고동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세종대왕이 초정리를 찾은 것이다. 당시 세종대왕은 정인지, 최항, 백팽년, 신숙주, 성삼문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백성들이 얼마나 잘 이해하고 학습할 수 있는지 현장에서 직접 챙겼으며, 선조(先祖)를 경애하고 공경심을 온 몸으로 실천하기 위해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고 있었다. 이와함께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등 과학기술 서적을 출간하고 <효행록>, <아악보>, <세종실록악보>, <삼강행실도> 등의 예술 및 풍속 서적을 백성들에게 보급하던 시기였다. 그러니 병도 치료하고 그간의 많은 연구실적을 현장에 적용하고 보급하며 무엇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 연구하는데 초정리만한 곳이 없었다.

당신은 아침저녁으로 약수를 마시고 초정리 자연과 호흡하며 사색을 즐겼다. 길섶의 코스모스랑 쑥부쟁이, 그리고 아름다운 가을나비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름 모를 가을꽃 천지를 보며 그저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사는 꽃과 생명들에게는 순결한 생명과 에너지가 있음을 확인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민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들녘의 농기구를 개발하고 품종을 개량하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신은 이 나라 백성들에게 희망과 열정, 사랑과 배려의 미덕을 만들어 주는 것이 임금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오래 살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하며,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편안하게 죽음을 맞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80세 이상 노인에게는 양로연(養老宴)을 베풀고 90세 이상 노인은 관직을 제수했다.

또 토지 1결당 쌀 생산량을 최고 4배까지 증가시켰으며 경작지를 두 배 이상 확대시키는 등 굶어 죽은 사람이 없도록 하는데도 힘썼다. 의녀제도를 전국으로 확대하고 도성의 기와집과 온돌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어디 이뿐인가. 관청의 여자 노비가 아이를 낳게 되면 7일간 출산휴가를 주던 제도를 100일로 늘렸으며 남편에게도 한 달간 산후 휴가를 주도록 했고 어린 아이의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제생원을 개선하고 감옥에서 수감자들이 죽지 않도록 특별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감옥은 죄를 다스리는 곳이지 사람의 몸과 마음을 황폐화시키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임금은 "열심히 살아라, 열심히 살아야지 삶이고 그래야만 희망이 있는 것이다. 농사나 학문도, 상업이나 예술도, 과학이나 건강도 열심히 살아야만 뜻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며 부지런한 삶, 겸손한 마음, 존경과 경외의 자세를 강조했다.

나무는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고 천지에 가을바람만 가득할 즈음 당신은 다시 서울로 행차했다. 행궁생활 90일만이었다. 그 간 욕심과 번뇌를 떨쳐버리고 백성과 자연의 품에서 살아온 당신은 "나 서울로 돌아가지만 마음은 늘 초정리에 있으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같은 초정리의 정겨움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가서 말하리라. 아름다웠다, 행복했다, 기운찼다라고…"

당신은 이처럼 마을 사람들 가슴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남기고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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