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최우식 '사람&사람' 법률사무소 변호사

'데이트강간'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도 간혹 사용되는 말이지만, 아직까지 이 개념은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정서에 잘 부합하지 않는다. 합의에 의한 '데이트'와 상대의 의사에 반하는 '강간'이 상호모순적인 개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스스로 원해서 만나는 남자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강간'이 성립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사회에서 '데이트 강간'은 성범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심각한 사회문제다. 미국남성들이 한국남성들보다 성적으로 더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어서가 아니다. '강간죄'에 대한 규정과 법집행이 한국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엄격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형법은 여자들이 '완강히 저항'하지 않는 한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파악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와 정반대로, 여성이 능동적으로 동의를 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성적 행위는 강간으로 간주한다.

한국에서 '적극적 저항'을 범죄의 구성요소로 보는데 반해, 미국에서는 '여성의 적극적 동의'만을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보고 있는 것이다.

두 개의 비슷한 사례를 비교해보자. 먼저 지난해 필자가 맡았던 사건중 대학교 박사과정의 피해자가 지도교수에게 모텔에서 강간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피해자는 불쾌했고 그래서 싫다고 분명히 말했지만 지도교수와의 관계상 소리를 지르거나 그 장소를 빠져나오지를 못했다. 그런데 가해자인 지도교수는 피해자와의 '특별한 관계(연인)를 들어 화간이라 주장했다.

검사는 당사자간의 특별한 관계에 비추어 '항거불능이나 반항이 현저히 곤란'하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불기소했고, 이에 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했으나 법원도 기각했다.

반면 2003년 1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피해자는 남자친구와 합의에 의한 성관계를 가졌다. 관계 도중 그녀는 마음을 바꾸어 "이제 집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만두라'는 구체적인 거부의 의사가 아니라고 생각한 남자친구는 행위를 계속하다가 그녀가 네번째로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자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런데 남자친구는 강간으로 구속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명백히 동의에 의해 성관계를 시작했다 하더라도 상대가 마음을 바꾸어 거부의사를 표하면 즉시 그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미국 캘리포니아 대법원의 판결이었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 대법원은 강간죄의 폭행·협박의 정도에 대해 기본적으로 '항거불능 또는 현저히 곤란'을 요구한다.

반면 미국은 피해자의 반항의사인 저항요건을 성폭행죄 성립요건에서 제외하고, 프랑스는 성폭행죄 성립에 폭행·협박이 필요하지만 그 정도는 피해자 의사에 반할 정도면 충분하며 영국은 피해자 동의없이 행한 성행위를 모두 성범죄로 규정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형법은 성폭력이라는 끔찍한 범죄상황에서 피해자에게 '필사의 저항'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법논리 뒤에는 남성중심적 사고방식이 자리잡고 있다. 몇 년 전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 한국 남성법조인의 60% 이상이 '여성의 야한 의상이 성범죄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형법은 철저히 피해자의 신변보호에 초점을 두고 있다. 범죄구성요소로 피해자의 '저항'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물론, 피해자의 저항행위가 목숨을 위협하는 대단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가해자와 맞서 싸우는 것이 상황을 피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더 나아가 대단히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서울 중곡동 강간살인범은 피해자가 반항해 성폭행에 실패하자 흉기로 살해했다.

저항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는 피해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형법은 '목숨을 건 사투' 아니면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는 이분법을 강요하고 있다.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범죄상황 하에서 '적극적 저항'을 요구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닌 국가기구가 할 일이 아니다. '정절 아니면 목숨'이라는 조선시대의 '은장도 정신'이 현대의 법정신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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