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권택인 법률사무소 충청 변호사

송강호 주연의 영화 '변호인'이 우리나라 영화 역사상 다섯 번째로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는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겠지만, 이 영화는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인권변호사 시절의 일화를 바탕으로 만들어 졌다.

물론 그 분의 정치인으로서의 인생궤적을 놓고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비난을 하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인권이 가벼이 여겨지던 시대에 부당한 국가권력에 맞섰던 인권변호사로서의 삶에 대하여는 많은 국민들이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극도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 한 인물의 '인권변호사'라는 타이틀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우호적인 평가가 있는 것을 보면 '인권변호사'라는 타이틀은 하나의 고급 변호사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런데, 인권신장에 목숨걸고 노력한 직업군이 어디 변호사 뿐이랴.

노동탄압의 시대에는 노조를 결속하여 악덕업주에 맞선 노동자, 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에 거리로 뛰쳐나온 대학생, 건국초기 부정선거에 항거한 무명의 시민들까지. 사실 셀 수 없이 많은 직종의 시민들이 인권운동을 하였지만, 인권대학생, 인권노동자, 인권시민, 이런 단어는 생소한데 반하여 '인권변호사'라는 단어가 낯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되돌아보면, 인권신장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수많은 민주화 인사, 인권운동가 중에 변호사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지만 인권변호사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역설적으로 국민은 인권변호사를 애타게 찾고 있었음에도 인권변호사는 희소했기 때문에 사회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는 변호사들을 탓하는 의미로 많이 사용된 때문이 아닐까?

영화 '변호인'을 본 필자의 몇몇 지인들은 필자에게 영화 '변호인'을 어떻게 보았느냐는 질문을 하곤 한다. 그 질문에는 필자의 정치적 성향을 확인하고자 함과 '너는 인권변호사인가'를 묻고자 하는 두 가지 의도가 담겨있음을 필자도 잘 안다.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필자는 단지 "영화는 재미있었고, 송우석 변호사는 무척이나 뜨거운 변호사였다. 그러나, 그런 뜨거운 변호사가 필요한 국가는 결코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므로 필자는 인권변호사 되고 싶지 않다."는 대답을 한다.

물론 필자도 변호사 배지를 달기까지 한번쯤은 돈이 없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의뢰인을 위하여 법정에서 "재판장님 이의있습니다!!"를 외치며 필자에게 닥칠 수 있는 좋지 못한 상황을 감수하면서 부당한 공권력에 저항하는 인권변호사를 꿈꿨던 적은 있었으나, 필자는 인권변호사가 아니다.

우리나라 법원은 친절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영화 '변호인'에서처럼 법정에서 뜨겁게 변론할 만큼 부정의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세인들이 말하는 인권변호사가 될 수가 없었던 탓도 있다. 심지어 요즈음에는 법원이 친절하기까지 하니, 세상 사람들이 규정지어 놓은 '인권변호사'라는 브랜드를 차지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필자를 '인권변호사'로 부르는 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마도 요즈음 필자가 공익소송지원단의 일원으로 소송비용을 직접 부담해가면서 개인정보 유출관련 공익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 오해(?)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는 변호사에게 주어진 공익에 관한 최소한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므로 필자에게 '인권변호사'라는 브랜드를 붙이기에는 아직은 모자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요즈음 진행하는 공익소송에 관한 소문을 듣고, 생계가 넉넉지 못한 분들이 찾아와 이런 저런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조력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필자는 그 분들의 간절한 믿음에 배신감을 줄 수 없어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최대한 상담에 응해 드리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필자의 뜻과 상관없이 '인권변호사'가 될 우려(?)까지 있다.

어쩌면 '인권변호사'는 변호사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상황에 맞물려서 인권의식이 높은 국민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영화 '변호인'의 송우석 변호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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