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법률사무소 '충청'변호사· 법무부 자문위원

"이번 작전중 당신이 사망하거나 이 작전이 외부로 알려지거나 경우, 국가는 당신의 존재를 부정할 것이다. 이 명령문은 30초후에 자동폭파될 것이다. 행운을 빈다." 007시리즈나 미션임파서블 등의 첩보영화 도입부분에는 이런 대사가 종종 등장한다.

영화는 영화로만 재미있게 보아야 함에도 필자는 과연 '국가가 그래도 되는가'라며 법률 서적을 뒤척이게 된다. 이러한 필자의 행동은 직업병에서 유래한 것라고 짐작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상천외한 사건들을 떠올린다면 필자의 그와 같은 행동을 마냥 직업병으로 치부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왜 사건이 알려지면 존재가 부정되어야 하고, 왜 그와 같은 임무부여 사실이 폭파와 함께 잊혀져야 하는가? 아마도 그 첩보원에게 부여된 임무가 그 나라의 법에 근거한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가는 법에 근거하지 않은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원칙을 법치주의라 하고, 법치주의에 의해 모든 국가 작용은 오로지 국회에서 제정한 법에 따라 행하여지도록 함으로써 자의적인 국가작용으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보장되는 바, 법에 근거하지 않은 국가기관의 첩보업무 수행은 반인권적 위법행위이다. 그러므로, 정보기관 요원의 비법적 첩보행위가 드러날 경우 국가는 해당 공무원의 존재를 부정하여야 모든 국가기관을 기속하는 법치주의 원칙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는 외관을 갖출 수 있다.

영화상 제임스본드에게 부여된 007코드는 영국정보기관의 살인면허로 설정되어 있는데, 아무리 영화적 설정이라 해도 첩보원이 첩보활동 중 적극적으로 살인을 해도 좋다는 법률이나 확립된 판례가 영국에 있음을 전제로 했을 리 없다. 그런 상황에서 유죄를 인정할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강한 심증이 있는 핵(核) 테러범죄혐의자 등을 법에 따라 처리할 경우 엄청난 국가적 재난이 발생할 현존·명백한 위험이 있을 때, 제임스 본드가 나서서 비법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 사건이 드러났을 때 국가가 이를 부정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현실이 항상 영화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영화의 설정과 최소한의 싱크로율 정도는 있어줘야 영화처럼 위험을 무릅쓴 고독한 첩보원의 애환이 동정받을 것이고, 그 같은 반법치주의적 행위가 인류의 당면한 위협 해소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인간적으로나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유야무야 넘어간 우리나라 정보기관 관련 사건 하나를 들춰보자. 과거 국산 전투기 수출과 관련하여 내한한 외국 사절이 투숙하고 있던 호텔에 우리나라 정보기관 요원이 외국의 구매정보를 사전에 알기위해 잠입하였다가 호텔직원에게 들통나서 외교문제로 비화된 사건이 있었다.

영화였다면 투명망토를 뒤집어쓰거나, 건물밖으로 뛰어내려 미리 준비되어 있던 낙하산을 타고 유유히 사라지거나, 순간적으로 직원을 제압하고 탈출했을 법한 장면에서, 그 요원은 호텔직원에게 붙들려 스스로 정보기관 요원임을 밝히고 순순히 조사에 응했다고 한다. 따라서, 국가가 굳이 그 요원의 존재를 부인할 일도 사라졌다.

판례에 따르면 상사가 위법한 지시를 하였을 때, 명령을 받은 자는 그 위법한 지시에 응하지 말아야 하고, 만일 어쩔 수 없이 응했다면 지시자는 물론이고 행위자도 형사처벌을 받는다. 국가 정보기관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국가는 법에 따라 죄를 범한 정보기관 요원과 이를 지시한 자들을 모두 형사처벌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법치주의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처럼 국제화된 정보사회에서 국가 정보기관은 반드시 필요하고, 그 특성상 음지에서 비밀스럽게 운용되어야 할 필요성은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들이 활동하는 음지가 댓글 작성용 PC앞이면 곤란하고 그들이 지향한 양지가 특정 정치세력의 양지에 수렴해서는 안된다. 나아가 법원을 기만하는 증거위조 같은 중대범죄는 두말하여 무엇하랴.

남북이 극단적으로 대치하고 상황에서 지금같은 안보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부분의 무명 정보요원들은 음지에서 강한 애국심을 가지고 큰 희생을 하고 있다는 것이 충분히 짐작된다. 그분들의 애국심과 희생이 정파적 이해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거나, 국민적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되는 일이 없어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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