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걸출한 영웅이다. 그는 수도를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기면서 종래의 정책을 바꾸어 서쪽을 지키고 남쪽을 공략하는 이른바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폈다.
 중국 본토로 북위(北魏)의 세력이 강력한데다 호족들의 발호 등으로 천도를 단행하고 475년, 남진정책의 서곡으로 한성백제를 공격하게 된다.
 장수왕은 백제를 공격하기 이전, 도림(道琳)이라는 첩자를 잠입시켰다. 승려인 도림은 바둑의 고수였는데 백제 개로왕이 또한 바둑을 좋아하여 도림을 환대했다. 개로왕과 친분을 쌓은 도림은 왕권 강화를 위해 궁궐을 웅장하게 짓자고 제안한다.
 개로왕은 이를 받아들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인다. 국력이 탈진될 즈음, 장수왕은 한성백제를 대대적으로 공략한다. 토목공사로 국력이 쇠약해진 백제는 초토화되고 개로왕은 전사한다. 피로 물든 그 역사의 현장이 오늘날 풍납토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개로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문주왕(文周王)은 고구려의 세력에 쫓겨 웅진(공주)으로 천도한다. 백제역사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던 한성백제는 이로써 종말을 고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잃어버린 왕국이 되고 만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의 영토는 아산만에서 죽령에 까지 이르게 된다. 삼국의 접경지대인 충북까지 고구려는 남하했다. 그 남하의 흔적은 1천5백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완연히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유물이 국보 제 205호인 「중원 고구려비」이다. 이 비는 마치 집안의 광개토대왕비를 축소해놓은듯 하다. 4면비라는 점도 그렇고 글자체가 동일하다.
 이외에도 충주지역엘 가면 고구려의 체취가 강렬하다. 건물터에서 출토되는 기와에서도 고구려의 체취가 묻어 있고 봉황리 마애불이 보여주듯 어딘지 모르게 고구려의 불상조성 기법이 스며들고 있다.
 청원 비상리에 있는 일광삼존불 또한 고구려의 기법이 일부에서 나타난다. 발끝까지 내려온 옷의 무늬가 X자로 교차하는 방식은 북위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식 기법이다.
 청원 부용면에는 유난히 산성이 많다. 금강 상류가 산자락을 굽이쳐 흐르는 이곳에는 마치 산성이 도열해 있는듯 하다. 여러개의 산성에서는 거의 신라 백제 계열의 유물이 출토된다. 신라·백제의 접경지대로 보이는 이곳에서 돌연 고구려 유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최근에 충북대박물관에서 발굴조사된 남성골산성에서는 유독 고구려 계통의 토기가 중점적으로 출토된다. 손잡이가 달린 토기라든지, 몸체가 긴 항아리는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이다. 신라, 백제의 각축장 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여기까지 남하했다는 증거다. 이중(二重) 목책(木柵)에다 수많은 저장용 구덩이가 발견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저장용 구덩이를 오늘날로 치면 중부권 내륙화물기지에 해당된다. 부강에서 가까운 갈산 등지에 건설되는 내륙화물기지를 상기하면 역사의 회전에 섬짓 놀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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