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이탈리아의 첫 만남은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란당시 도공(陶工)을 포함한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해양제국을 꿈꾸던 일본은 당시에도 서구와 잦은 문물교류를 했다.
 그때 이탈리아 선박이 일본에 와서 머물렀는데 조선인 포로중 한 명이 이탈리아 선원에게 팔려가 또다시 머나먼 이국땅으로 떠나게 된다. 그가 바로 「안토니오 꼬레아」다. 안토니오는 낯선 항해와 이국생활에서도 조선에서 입던 의복을 꼭 챙겼다.
 10여년전, 거장 루벤스가 그린 「안토니오 꼬레아」의 초상화가 경매장에서 비싼 값에 팔린바 있다. 초상화에 나타난 안토니오는 외투로 철릭(天翼)을 걸치고 있다. 철릭은 조선시대 평민들이 통상적으로 착용하던 겉 옷이다.
 불행한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있은 잘못된 만남이었지만 이 것이 양국 교류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아직도 안토니오 코레아의 자손들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살고 있다.
 1백여년전 이탈리아 외교관 「까를로 로제티」가 한국에 머물며 보고 느낀점을 쓴 「한국과 한국인(꼬레아 꼬레아니)」이 10여년전 국내에서 번역 출판된 적도 있다.
 축구를 통해 양국이 처음으로 만난 것은 엉뚱하게도 하와이 포로 수용소에서 였다. 2차대전 당시, 일제에 강제 징집되어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의 포로가 된 장갑선씨(보은군 탄부면 장암리)는 귀국길에 2천7백명에 이르는 한인 포로명단을 갖고 왔다.
 차후에도 서로 잊지 말자고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프린트로 만든 책이었다. 여기에서 흥미있는 사실은 포로명단 이외에도 대한의 자유와 독립을 갈구하면서 「자유한인보」라는 프린트 잡지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잡지라고 보기엔 너무 초라하나 그 안에는 문학작품, 시론, 수필 등을 담아 이채를 띠고 있다. 바로 이 잡지에 이탈리아와의 축구경기 소식이 등장한다.
 「컴파운드Ⅰ」,「컴파운드 Ⅱ」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포로 수용소내에서 포로들간에 축구경기가 열린듯 하다. 이탈리아는 일본과 함께 패전국이므로 양국의 포로가 하와이 수용소에서 함께 머문 듯 하다. 일본에 의해 징용당한 조선인들은 포로가 되어 로마병정들과 이렇게 조우한 것이다.
 『컴파운드 Ⅰ에서 모셔온 여섯 분을 맞이하여 지난 11월 11일(일요일) 컴파운드 Ⅱ에서 열렸던 對 이태리 축구시합은 무려 6백여명의 관중이 열렬한 성원하에 거행되었다. 우리 선수는 운동장과 선수 서로가 낯설었으나 끝까지 힘을 다해 싸웠고 보기 싫은 짓은 하지 않았다. 5대3으로 석패하였으나 스코어에서 유감스러울게 못된다...』
 그로부터 57년이 지난 오늘, 월드컵 8강전에서 한국의 태극전사는 로마군단을 극적으로 물리치며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했다. 아드리아해를 휘젓고 루비콘 강을 건너 대 로마제국을 건설했던 그들의 후예도 한국의 붉은 악마앞에서는 꼼짝 못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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