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 고인돌과 더불어 청동기 문화를 대표한 선돌은 그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며 경계 표시(Land Mark)의 기능을 가졌다. 남한강과 금강이 흐르는 충북에도 수많은 선돌이 남아 있는데 이중 지방자치와 연관된 선돌이 있어 주목을 끈다.
 충주댐 조성으로 수몰이 된 제천시 청풍면 황석리에서는 여러 기의 고인돌과 더불어 한 쌍의 선돌이 충북대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된 바 있다.
 이곳의 선돌은 암, 수 한 쌍으로 전형적인 선돌의 형태를 갖추었는데 선돌자체 보다도 선돌의 배치형태가 관심을 집중시킨다. 나란히 한 쌍의 선돌을 배치한 사이로 사람이 앉을수 있도록 10여개의 평평한 돌을 타원형으로 배치하였는데 의장석에 해당하는 가운데 자리는 약간 큰 돌을 배치하였다.
 3천년전, 청동기 시대에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상의하던 흔적이다. 좌석배치는 수직적이 아니라 오늘날 원탁회의를 연상하게끔 수평적 개념을 도입하여 타원으로 만들었다. 이로보아 당시 사회의 수장(首長)은 지배자((Ruler)가 아닌 지도자(Leader)로서 자리매김한 것 같다.
 이런 형태의 선돌과 회의석 배치는 인도 아샘지방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황석리에서 찾아진 것인데 오스트리아의 학자 하이네 겔더른은 이를 두고 「메가리텐」이라 했다. 즉 성(聖)스러운 영역이라는 의미이다.
 세계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선사시대의 선돌이 우리 고장에서 발견되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욱 관심을 끄는 대목은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원초적 형태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지방자치의 형태가 모두 수입형인데 반해 황석리 선돌에서 보듯 토종 지방자치도 존재했다는 얘기다. 이 선돌은 충주댐 수몰로 현재 충북대 잔디밭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황석리 선돌의 민주적 회의 형태는 신라의 화백제도로 이어진다. 6부 촌장이 모여 임금을 뽑고 나라의 대소사를 논의한 전원일치의 회의제도였다.
 전제 군주시대로만 인식되온 조선시대에서도 민주적 요소가 곳곳에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장의 임기도 있었으며 이를 탄핵하는 방법도 있었다. 청주목사의 임기는 6년인데 주민이 원할 경우 1회에 한하여 중임토록 했다.
 지방자치단체장이 실정(失政)을 하면 태실(임금의 태를 묻어 두는 곳)을 허물어 간접적으로 탄핵하였는데 이를 변작(變作)이라 했다. 충주에 있는 경종 태실은 도굴에 의해 파손된 것이 아니라 바로 변작에 의해 도괴되었다가 복구되었다. 변작이 발생하면 나라에서는 관리 책임을 물어 해당 지방자치단체장을 해임시켰다.
 지방자치 민선 3기가 출범하였다. 아직 일천하기는 하지만 부디 황석리 선돌의 지방자치 정신을 본받아 주민을 하늘처럼 떠 받드는 민본행정과 앞서가는 민주적 의회상을 정립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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