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법률사무소 충청 변호사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로서 무리 불합리한 법이라도 반드시 법체계는 지켜져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세간에는 그 말을 소크라테스가 정말로 했네 안했네 말들이 많지만 그 의미가 중요하지 누가 그 말을 했든 무슨 상관이랴.

필자의 기억에는 법대 학부 재학시절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일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사회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악법이 과연 법인가에 대하여 수많은 논쟁을 해왔고, 지금도 누군가는 그에 대하여 술판의 안주거리로 자주 이야기를 할 듯하다.

특히 몇해전 미국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센델 교수가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더욱 잦아지더니, 급기야는 최근 그 위상을 더해가는 헌법재판소의 간통죄 위헌결정이 있자 더욱 활기를 띄는 듯하다.

법이 추구하는 양대 가치는 정의와 법적안정성이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두 가치가 충돌하면 법적안정성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법적안정성 완승의 선언이다. 이를 좀 더 쉽게 풀면 오래동안 어떤 법이 지켜져왔고, 많은 이들이 그 법에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그 법이 비록 정의롭지 않더라도 많은 이들의 안정적인 생활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정의로운 무질서보다 부정의한 질서가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구미에 맞는 상황일 수도 있겠다.

법을 다루는 필자는 가끔 의뢰인으로부터 악법도 법이냐는 공격적인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런 경우 변호사는 힐링 테라피스트로서 의뢰인의 입장에서 의뢰인에게 해가 되는 악법은 법이 아니라고 편을 들곤 한다. 하지만 이는 의뢰인의 심리적 안정을 도모하는 방편에 불과하다. 실은 이와 같은 정의와 법적안정성의 상관관계에 관한 해묵은 논쟁에 대하여 정답에 근접한 결론이 이미 나와 있기 때문이다.

즉, 정의와 법적 안정성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 그 해결방식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제정되고 그 집행이 권력에 의해서 보장되는 실정법은 설령 그 내용이 부정의하고 비합리적이라고 하여도 정의의 원칙보다는 일단 우선성을 가진다. 그러나 실정법이 너무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정의에 위반하는 경우에는 '정당하지 못한 법'(악법)이 되며, 이때에는 정의가 법적 안정성에 우선한다. 그런데 정의가 단 한번도 추구되지 않은 경우, 즉 실정법의 제정 때 정의의 근본을 이루는 평등이 의도적으로 부인되고 침해되는 경우에는 그 실정법은 '정당하지 못한 법'(악법) 조차도 못되며 법으로서의 자격 그 자체가 박탈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과서적인 답변을 의뢰인에게 하는 것은 의뢰인의 마음의 상처를 씻기는 커녕 사건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의뢰인의 머리를 쥐나게 만들 것 같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라드브루흐 공식으로 명명된 위 해결방식은 독일의 법철학자 라드브루흐가 제시했는데, "참을 수 없을 만큼 부정의한 실정법은 법이 아니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실정법이 너무도 참을 수 없는 정도로 정의에 위반한다는 판단은 과연 누가 내릴까? 이에 대한 논쟁에도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제의 참거짓을 논하는 것 이상의 치열함이 있기는 하나, 아마도 우리 실정법이 정하고 있는 판단권자는 법을 개정하거나 폐지할 수 있는 입법권자 내지 법률에 대한 위헌 결정을 내릴 권한이 있는 헌법재판소 정도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즉 입법자들은 '부당하다는 반성적 고려'에서 법령을 개폐할 수 있다. 이 경우 과거의 법령에 대한 저촉행위를 한 자는 개폐된 법령의 적용을 받아 형벌을 받지 않는다. 이는 법을 만드는 자의 결단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

또한 헌법재판소가 9인중 6인 이상의 찬성으로 법률의 위헌 결정을 내리게 되면 그 법률은 소급해서 무효가 되어버리기까지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헌법재판관님들은 참을성이 참 많으신지 법률위헌 판단에 많이 인색한 느낌이다.

매사에 무덤덤한 필자조차도 여야의 얼렁뚱땅 합의로 입법된 민생고 심화법들을 여간해서는 참기가 힘든데, 간통죄 처벌도 참지 못할 부정의라 판단하신 헌법재판관님들은 민생고 심화법률에 대해서는 잘도 참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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