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동아시아문화도시 사무국장

풍경이란 '하나의 몸짓'이다. 골목길 돌담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도, 뒤란에 가지런히 피어나 맑은 미소를 띄우는 채송화도, 오랜 시간 풍화작용을 딛고 서 있는 낡은 건물도, 새들과 소나무와 낮잠자는 고양이와 오가는 사람들의 풍경 모두가 '하나의 몸짓'이다.

몸짓을 몰입할 때 아름답다. 권태는 무기력과 건조한 것들을 불러오지만 몰입은 성장과 생성과 솟구치는 힘을 만들어준다. 그래서 풍경은 공간이 되기도 하고, 사랑을 낳기도 하며, 더 큰 세계를 만들기도 하다.

세상이 지식인의 서재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철학가의 서재, 문학인의 집필실, 음악인의 방 등 지식인들의 공간에는 저마다의 삶의 이야기와 지난 세월의 가슴 뜨거운 궤적이 담겨 있다.

때로는 피를 토하는 아픔을 겪기도 할진데 그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스토리텔링이자 한 편의 드라마라 할 것이며, 살아있는 박물관이자 미술관이 아닐까.

마른장마와 뜨거운 태양으로 도시 전체가 기진해 있던 그날 오후 나는 이 시대 최고의 석학이자 크리에이터 이어령의 방을 앙가슴 뛰는 마음으로 엿보았다.

평창동 산자락에 위치한 당신의 서재는 크고 넓기도 했지만 수많은 자료들로 가득하되 질서정연하며 정감이 넘쳤다.

창 너머로 칠월의 초록 감성이 시원스레 밀려왔는데 겨울에는 설경이 일품일 것이며, 봄에는 새순 움트고 만화방창 꽃들의 낙원일 것이다.

그리고 가을에는 붉게 물든 풍경이 하나 둘 사위어갈 것인데 당신은 이러한 풍경을 품으며 사계절 책 읽는 소리와 글 짓는 일과 창조의 밭을 가는 일에 매진해 왔을 것이다.

집필실과 거실로 나누어진 서재는 당신이 직접 설계하고 디자인 했으며 연출과 배치 등 모든 것을 지휘했다.

거실은 바깥 풍경과 내부의 디자인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수만 권의 책을 감싸고 있는 것은 한옥의 전통 미닫이 문이다. 길고 큰 문을 열어 재치면 서재의 풍경이 쏟아지고, 문을 접으면 미끈하고 시원스레 창호의 자태를 뽐낸다. 책과 한옥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골동품에서부터 회화, 조소, 공예, 생태 등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것들로 안성맞춤이다.

집필실은 어떠한가. 방송에서도 공개된 적이 있는데 책상에는 6대의 컴퓨터 각종 모바일 기기가 집필, 편집, 검색, 창조, 저장 등의 기능을 하고 있고 책마다 오방색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다. 당신에게 포스트잇은 아날로그식 정보검색의 중요한 도구였던 것이다. 집필실은 한 마디로 디지로그의 열정충전소였다.

삶과 지식과 지혜와 창조의 바다에서 방전돼가는 열정을 채워주는 곳 말이다.

그래서 당신은 집필실에 있는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씨의 그림과 7마리의 코끼리 캐릭터를 특별히 아낀다. 자만하거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와 혁신을 선도하며 창조의 최전선을 달리기 위해서다.

브레히트는 "지식을 얻어라, 추위에 떠는 자여! 굶주린 자여, 책을 손에 들어라. 책은 하나의 무기다"라고 노래했다. 책이야말로 지식의 최전선이며,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 삶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이다.

조선 중기의 다독(多讀)시인으로 알려진 백곡 김득신은 1만 번 이상 읽은 책이 36권이나 된다. 자신의 서재를 억만재로 부르기도 했다.

백범 김구 선생도, 단재 신채호 선생도 문화의 힘을 강조하며 끝없는 탐구와 독서를 강조하지 않았던가.

이어령의 서재는 시공을 뛰어넘어 불멸을 향기를 주고 있다. 살아있는 수많은 자료와 작품들로 가득한 박물관이고 미술관이다. 동서고금 수많은 책의 숲이 펼쳐져 있는 문학관이며 창조의 보고(寶庫)다. 말 그대로 디지로그의 산실인 것이다.

청주로 내려오는데 비바람이 차창을 후려친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나는 지금 어떤 열정을 가슴에 품고 사는가. 그 열정을 위해 밤새워 책이라는 연장을, 정의라는 독배를 들어본 적이 몇 번이나 되는가. 옛 것을 품고, 대지의 숨결을 느끼며, 책의 향기를 마시고, 멋진 신세계를 만들기 위한 여정에 머뭇거리지는 않았는가.

다시, 신새벽의 정신으로 일어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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