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 교정자문위원

근래에 들어 갑의횡포에 관한 이야기들이 자주 들려온다. 기업간 주종관계의 갑을관계는 이제 일상어가 된지 오래이다. 나아가 고객의 갑질이나, 고용주의 갑질이 언론보도에 종종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모든 계층과 모든 영역에서 상하적 갑을관계가 보편적인 질서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원래 갑을관계는 계약서상에서 계약 당사자의 수평적 관계를 순서대로 지칭하는 법률 용어였던 '갑(甲)'과 '을(乙)'에서 비롯되었다. 주로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을 제안하는 계약서 문구에 자신을 지칭하는 용어로 '갑'을 상대방을 지칭하는 용어로 '을'을 기재하던 관행에서 시작하여 현재는 사회적 주종관계 나타내는 개념으로 변질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갑을관계의 의미가 변질되어 사회적 지위차이가 만드는 부조리를 표상하게 된 이유에는 여러 분석이 나오고 있으나, 대개는 서구의 자본주의가 우리나라에 빠르게 이식되는 과정에서 전근대적 계층의식이 없어지지 않고 "돈이 곧 계층"이 되어버려 "돈이면 다된다"는 생각 때문이라는 점에 큰 이견은 없다.

현실적으로 계약 당사자간 협상력의 우열이 없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계약에 죽고사는 서구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갑을관계'에 대칭될 만한 'AB relation' 따위의 조어가 서구에는 없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갑을관계에 관한 인식은 서구에 비하여 크게 비뚤어져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서구에도 갑질이 존재했다. 서양사를 살짝 들쳐보아도 마을 처녀의 처녀성을 영주에게 바쳐야 하거나, 농노제도와 관련한 엄청난 갑질이 있어 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갑질이 결국에는 을들의 반란인 시민혁명을 촉발시켰고, 결국 그로인해 귀족계급이 몰살당하는 역사적 사건도 있었다. 그 결과 현대 서구사회에는 시쳇말로 갑이 스스로 알아서 적당히 기는 문화(?)가 어느 정도 정착되어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에 갑이 땅콩 제공방식을 두고 을에게 갑질을 했다가 그 갑은 콩밥을 먹어야 했던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이 있었다. 그 후 조금씩 갑의 품격을 문제삼는 여론이 생긴 것을 보면 갑의 품격을 높이는 학습에는 혁명과 같은 외부충격이 더 효율적일 수있다는 생각조차 든다.

변호사 업계에도 드물기는 하지만 갑의 횡포가 존재한다. 과거에는 법률지식을 독점한 변호사가 갑질을 했다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전설같은 이야기다. 지금은 변호사 사무실의 문턱이 낮아지고 일반인도 비교적 손쉽게 법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까닭에 의뢰인을 갑으로 대접하여야 하고, 그것이 업의 본질에 부합한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여 많은 사람들은 변호사의 조력을 받는 것을 "변호사를 산다"고 표현한다. 의뢰인이 법조인력 공급과잉 시장에서 매수인으로서 갑의 지위를 누리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변호사를 샀"으니, 주말이고 밤낮이고 가리지 않고 시시때때로 전화하는 의뢰인은 차라리 양반에 속하고, 소송 진행의 결과에 대하여 원망을 하는 경우는 도가 지나친 경우라도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관계를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변호사에게 그에 대한 법적 전망을 물어놓고 그에 대해 변호사가 답변하면, 그때마다 빼놓고 이야기한 사실관계를 하나씩 둘씩 첨가하면서 스무고개 게임을 하면서 예지력없는 변호사를 타박하거나, 여러 변호사들을 순회하면서 여기저기서 얻은 무료 상담 내용을 다른 변호사에게 OX퀴즈식으로 물어가면서 교차 검증한 후 변호사별 상담 통계만 내고 상담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사라지거나, 변호사가 진행하던 소송이 승소에 이를 즈음에 이러저러 이유를 대며 변호사를 해임한 후 성공보수를 지급하지 않으려 하는 경우는 변호사의 인간적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갑질에 다름 아니다.

갑질의 진정한 폐해는 갑질의 직접 피해자들이 당하는 눈앞의 아픔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갑질하는 것이 당연하고 익숙해지는 것, 그래서 사람간에 오고가는 정없이 돈으로 한순간의 주인이 되려는 시도가 만연해져서 결국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되돌아가버리는 것이 진정한 폐해라 할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상품이나 서비스 같은 것들이지 그 공급자의 인격은 아니라는 지극한 상식을 가진 품격있는 갑들이 많아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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