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혀] 도서 리뷰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늦은 밤 케이블채널에서 비밀독서단을 만났다. 그들이 토론하고 있던 책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였다.

패널들은 이것이 페미니즘 문학인가 아닌가에 대해 논쟁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감성으로 접근한 페미니즘의 정수라 일컬었고, 누군가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전쟁을 통해 녹여냈다고 굳이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영미의 페미니즘의 갈래가 다르다고 하면서 페미니즘에 반역하는 책이라고 설파하기도 했다. 그들의 주장은 만족스럽지 않았고, 급기야 나는 충북대 도서관 서가에서 책을 빼들었다.

1941~1945년에 일어났던 전쟁, 우리는 그것을 세계 2차 대전이라 부르지만 소련의 여성들은 대조국 전쟁이라 칭한다. 200여명의 그녀들을 만나서 작가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 목소리를 가감없이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책속의 주인공은 독일에 침공에 맞서 분연히 일어났던 여성들로, 생리를 시작도 하지 않았던 16세 이하의 앳된 소녀들이었다. 누구도 그녀들의 열정을 만류할 수 없었다.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내 조국이 침공당했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던 그녀들은 전선으로 달려나갔다.

전쟁이후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그녀들은 작가와 대담을 하면서 40년전을 거슬러올라가 당시를 회상했다. 전쟁 이후 남성들은 영웅의 칭호를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녀들은 입을 닫아야 했다. 주위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와요, 꼭 다시 와야 해. 우리들은 너무 오랫동안 침묵하고 살았어. 40년이나…" (본문 중에서)

누군가는 밤새 전투를 치루는 과정에서 사람을 죽였고, 다음날 백발이 되어버렸다. 영웅이 탄생하는 전장의 이면에는 무수한 살육이 낭장함을 알게 된 그녀들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기 나이대로 살 수 없었다. 그녀들은 너무 많은 죽음을 보았고 한 생을 다 겪어낸 노파들로 바뀌어 있었다. 그녀들의 전쟁은 역사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전쟁의 와중에 있는 것이다. 살기 위해 악을 행했고, 악인줄 알면서도 죽일 수밖에 없었고, 그 괴로움으로 벌을 받을 것이라고 자책하는 그녀들, 한 편의 영웅담이 아닌 일상의 삶으로 표현해내는 전쟁의 모습은 확연히 이 책이 기존의 전쟁소설과 격이 다름을 알 수 있게 한다.

누구의 목소리로 세계를 말하는가? 누구의 경험이 주체가 되는가? 역사를 해석하는데 있어 우리는 다양한 목소리를 들었는가?

내가 배워온 세상은 가진 자들의 판단아래 쓰여진 역사다. 황인종 여성인 내가 배워온 역사는 백인 남성이 주인공이 되는 역사다. 나는 감히 이 소설을 '페미니즘의 정수'라 명명하고 싶다. 그녀들의 울부짖는 절규가 멀리 있는 옛날의 전쟁 같지 않다. 그녀들의 전쟁이야기는 현재에도 유효하다. 자본의 깃발아래 경쟁에서 상대를 제쳐야 자기 몫을 차지할 수 있는 지금이 또 다른 형태의 전쟁터일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누구도 상상하지 않았던, 들어본 적 없는 전쟁이야기다. 200명의 전쟁참가 여성들이 쏟아낸 전쟁의 실상은 시공간을 달리하는 지금의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되묻는다. 허구로서의 전쟁이 아닌 살아있는 목소리로 전쟁터로 이끈다.

성실과 효율로 전유되는 근대를 겪어온 우리는 탈근대의 세상을 살면서 '틀림'이 아니라 '다르다'는 차이를 일정 정도 수용해가고 있다. 페미니즘 역시 남녀가 같다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가 차별로 환원되는 세상의 가치를 전복하고자 한다. 여성의 권력으로 가부장의 권력을 누르려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목표다.

페미니즘은 재고 나누는 분열의 정치학이 아니라 통합하고 수용하는 실천의 학문이다. 분노할 것에 정당하게 분노하는 주체의 학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녀들의 목소리로 전쟁을 이해하고 해석했다는 의미에서 살아있는 여성들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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