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 교정자문위원

어린 시절 고학을 하면서 어렵게 자란 한 학생이 검사가 된다. 그리고 살인사건을 다루는 재판에 검사로 출석하여 여자 피고인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 피고인은 자신의 학업은 물론이고 끼니를 잇는 것조차 어려웠던 처지에 있었던 자신을 극진히 돌봐주었던 여선생님이 아니던가. 이에 검사는 준엄한 법과 옛 인연의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는 1948년 개봉된 영화 '검사와 여선생'의 스토리이다.

아름다운 추억을 공유했던 인연이 처벌해야 하는 입장과 처벌받아야 하는 입장으로 갈리어 재판정이라는 객관적 공간에 놓여지게 되는 상황을 마주치는 것은 법조인이 만나는 인연 중에서도 매우 드라마틱한 편에 속한다. 과거의 인연이 아름다울 경우에는 '검사와 여선생'같은 가슴 절절한 영화가 될 것이고, 과거의 인연이 악연이었다면 그들의 재회는 복수가 버무려진 치정물이 될 공산이 크다.

물론 세상에 법조인들만이 드라마틱한 인연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법정에서 재회하는 인연은 편안한 일상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승패소가 갈리거나 유무죄가 갈리는 무척이나 극적인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렇게 이해가 극명하게 나뉘는 법정에서의 상황은 법률가들에게 매일 드라마를 선사한다. 주로 비극으로.

그런 환경 탓인지 일전에 모 부장판사께서는 자신은 이제 어지간한 TV드라마를 보아도 크게 흥미를 가질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다. 하루하루 막장드라마 같은 악연끼리의 다툼을 현실에서 직접 처리하다 보니 TV드라마가 아무리 막장으로 꼬아대도 시큰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란다.

타인간의 다툼을 해결해야만 하는 법조인 특유의 업무 특성 때문에 남들의 악연을 지켜보다보면 마음에 굳은살이 생겨 덤덤해 질 것 같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가끔 가다 남의 악연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의 인연과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세상은 좁고 인연은 많구나 한다. 하지만 어찌하랴 법률가로서의 직업적 양심은 개인적 인연에 연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인연을 정의하기 위한 용어로 불가에서는 '겁(劫)'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천지가 개벽한 때부터 다음 개벽 할 때까지의 동안이라고 하니, '겁'이란 어쨌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긴 시간을 뜻한다 하여도 무방해 보인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2천겁의 세월이 지나면 하루동안 동행할 수 있는 인연이 생기고, 5천겁의 인연이 되어야 이웃으로 태어날 수 있고, 6천겁이 넘은 인연이 되어야 하룻밤을 같이 잘 수 있게 되고, 억겁의 세월을 넘어서야 평생을 함께 할 인연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법조인들은 법정에서 이런 인연의 충돌을 맞닥뜨리는 것이 일상이다.

법정에서 만나는 인연은 대개는 슬프다.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가급적 의뢰인과 다른 인연을 맺는 것을 꺼려하는 것은 인연이 가져오는 인간적인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인 까닭이다. 하지만, 그 외에 법조인이 되기까지 어려웠던 순간에 스친 인연이 법정 아닌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모습으로 만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그러니 필자는 악연이 넘치는 사건에 매몰되기보다 새로운 가연을 만나기 위하여 의외의 선택을 할 때가 많다. 필자가 변호사 시보생활로 흔치않은 엔터테인먼트 로펌 그것도 일본의 도쿄의 로펌을 택한 까닭이기도 하다. 며칠 뒤 필자는 시보생활을 한 일본 도쿄의 로펌으로 일본인 스승을 만나러 간다.

인연이란 것이 무서운 것이 하필 일본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의뢰인은 사건을 의뢰하기 위해 우연히 필자를 찾았고, 그 사건의 상대방 변호사가 과거 필자를 연수해준 일본 변호사님이셨기 때문이다. 이렇듯 과거 사제지간으로 만난 인연이 우연에 우연을 겹쳐 국제적 업무의 상대방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은 최소한 수백겁 정도의 인연은 되지 않을까?

물론 필자를 연수해준 변호사님을 사건 상대방 변호사로서 만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한다. 하지만 프로로서 어찌 손끝에 사정을 두겠는가. 스승에 대한 예의로 최대한 열심히 대하려고 한다. 그것이 변호사로서 재회한 사제지간 인연에 대한 예의가 아닐런지.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