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권택인 법무법인 충청변호사 법무부교정자문위원

필자가 법을 배우는 단계에서는 매우 쉽게 이해하였으나, 실무를 하면서 그 적용을 매우 힘들어 하는 관념이 "평등(내지는 평등원칙)"이다. 특히 인격의 평등을 넘어서 결과의 평등까지를 지향하는 유럽 국가들의 각종 실험적 조치를 보고 있노라면 평등은 멈추어진 관념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느낌까지 받곤 한다.

통상 평등을 이야기할 때 합리적 차별은 허용된다고 한다. 즉,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는 것이 진정한 평등이라고 하는데, 같음과 다름의 기준을 설정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을 너무 쉽게 정의한 듯하다. 예컨대, 개와 고양이는 네발로 걷는다는 측면에서는 같기 때문에 같이 취급하여야 하는지 울음소리가 멍멍과 야옹이라는 점에서 다르므로 달리 대우하여야 하는지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렇듯 평등은 쉬운듯 쉽지 않은 개념이다.

며칠 전 군와이스라는 유투브 영상을 매우 유쾌하게 본 적이 있다. 현역 군인들이 프로야구를 관람하다가 그 중 흥에 겨운 한 군인이 치어리더들의 단상으로 올라가 치어리더들과 함께 트와이스의 노래에 맞춰 응원을 하는 영상이었다. 놀랍게도 그 다음날 신문에 그 장병이 단상에서 응원할 때 모자를 벗었다는 이유로 징계위기에 놓였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 기사에 의하면 모 가수가 휴가를 나와 길거리에서 모자를 벗었다는 이유로 야외착모 규정위반을 이유로 징계를 받았고, 이번 응원하던 장병 역시 야외에서 모자를 벗었으니 법적용은 평등하여야 한다는 이유로 누군가 국방부에 신고하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법 적용은 모두에게 평등하므로 그 신고자의 해석이 맞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두가 즐겼고, 그 위반의 정도가 매우 경미하고, 어떠한 피해자도 없는 상황에서 많은 이들에게 의외의 퍼포먼스로 즐거움을 선사한 장병을 굳이 기계적으로 징계해서 어떤 정의를 세우려고 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마 그 신고자는 기계적으로 규범을 적용하여야 평등이 실현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평등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지향한다. 그러나, 같은 것이 다 평등은 아니며 또 다른 것이 모두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님은 당연하다. 원래 평등은 힘없는 약자와 가난한 빈민을 위한 이념에서 출발하였다. 즉, 평등은 약자와 빈자를 특별대우함으로써 약자와 빈민의 사회적 출발선을 강자와 동일하게 맞추어 놓기위한 개념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무런 고민없이 동일한 행위는 동일하게 기계적으로 처벌하여야 한다고 강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법을 거론하면서 우리 헌법상 평등 개념을 곡해한다. 그들은 평등을 같음으로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같음을 동일, 단일, 획일, 공통, 전체 등 위험한 개념으로 변질시키곤 한다. 이러한 곡해는 기회의 평등을 의미하는 좋은 의미의 평등을 전체주의, 기계적 평등과 같은 하는 나쁜 의미로 탈바꿈시키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어쩌면 많은 정치인들도 이러한 오해의 여지를 이용하여 평등을 무기로 표를 얻으려는 행동을 통해서 이러한 왜곡이 더욱 심화되도록 만드는 양상을 보인다.

독일의 철학자 엥겔스는 "평등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이 만들어낼 것을 요구하는 역사의 산물이며, 그 전제조건으로서 긴 역사적 과정을 가진다"고 하였다. 우리가 평등을 정의라는 큰 틀에서 보지 않고 그때그때 자기의 이익에 따라 기계적으로 적용하려 할수록 우리의 평등의 역사는 퇴보하게 된다. 우리 헌법 제11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법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천명할 뿐이고, 이는 앞서 말한바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것이지 모든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기계적으로 균등화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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