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3월, 금강의 중상류인 대전 갑천(甲川)변에는 블도저의 굉음이 봄바람조차 밀어부칠 기세였다. 대전신시가지 둔산지구 택지개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토목공사 면적만 해도 무려 2백40만평에 달하는 엄청난 택지개발 사업이었다.
 그 개발 사업 현장에서는 현장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긁개, 찍개,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 청동기 시대의 붉은 간토기(紅陶) 조각이 쏟아져 나왔다.
 둥근날 찍개, 마름모꼴 찍개 등은 돌려떼기, 세면떼기 수법 등으로 제작된 석기였는데 거친 수법으로 보아 중기 구석기까지 올려다 볼 수 있었다.
 빗살토기는 금강 상류인 영동 금정리 유적 출토품과 아주 비슷하였다. 서울 암사동 식의 「가는 빗살무늬」와 부산 동삼동 식의 「굵은 빗살무늬」도 함께 나왔다. 한강의 선사문화가 낙동강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금강가에서 보는듯 했다.
 구석기부터 신석기, 청동기에 이르기까지 선사문화를 포괄하는 이곳은 복합유적으로 손색이 없다. 개발의 삽날끝에서도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아 현지에는 선사유물관이 들어서 있다.
 대전(大田)하면 역사가 짧은 신흥도시로 알기 십상인데 둔산에서 보듯 적어도 2만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곳이 대전 일대다.
 금강 문화권에는 옛 도읍지가 여러 군데 있다. 첫번째 도읍지는 곰나루(熊津·공주)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한성백제는 막을 내리고 475년, 문주왕(文周王)은 공주로 천도를 한다. 이곳에서 80여년간 둥지를 틀다 성왕(聖王)은 538년, 다시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긴다.
 금강 상류 미호천변에 있는 청주는 1천3백년이나 된 고도(古都)다.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이 설치된데 이어 4년후에는 서원경으로 승격되었다. 신탄진과 마주보고 있는 청원 현도(賢都)에는 예로부터 도읍이 들어선다는 얘기가 내려오고 있다. 궁말, 궁들로 불리는 강외 궁평(宮坪)은 궁답(宮畓)이 많았던 곡창지대다.
 계룡산 남동쪽 기슭에 있는 신도안(新都內)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한때 수도로 삼으려던 곳이다.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한국의 십승지지(十勝之地)라는 길지(吉地)다. 나중에 국도로서 부적합하다는 판단에 따라 공역(工役)을 중단하였지만 아무튼 조선의 수도로 점지되고 1년간 공사를 벌였던 역사깊은 수도 후보지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을 선거 공약으로 제시하여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공약에 대한 충청인의 체감지수는 자연 클 수 밖에 없다. 노 당선자의 말대로 서울은 경제의 중심지로 육성하고 행정수도는 청주~대전 사이에서 조성되어 국토의 균형발전과 지방 분권을 이룩했으면 한다.
 5백년전 이성계가 1년간 토목공사를 벌이다 슬며시 꼬리를 내린 전철을 되밟아서는 절대 안될 일이다. 현도(賢都)가 현도(現都)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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