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띠해, 계미년을 맞아 구절양장(九折洋腸)처럼 생긴 산골마을을 찾아보니 다름아닌 보은군 회인(懷仁)이 거기에 해당한다. 오리(悟里) 이원익(李元翼)대감의 가마꾼이 피발이 되어 넘었다는 피반령(皮盤嶺) 아홉 굽이와 보은으로 통하는 수리티재(車衣峴), 문의로 통하는 먹티(墨峴)가 양의 큰 창자인듯 멀미가 날 정도로 꼬불꼬불하다.
 회인을 중심으로 하여 크고 작은 멧부리는 작은 창자인양 이리 저리 겹치고, 솟구쳤다 내려 앉길 거듭하니 중강복령 노요양장(重岡複嶺 路繞洋腸)이란 옛말이 새롭다.
 그 창자의 가운데에 길목을 차단하고 있는 눈썹같은 성(城)이 있으니 속칭 아미산성(峨嵋山城)이라고도 불리는, 매곡산성(昧谷山城·未谷山城)이다.
 회북면의 면소재인 중앙리에서 동쪽으로 올려다 보면 마치 사람의 눈썹처럼 생겼다해서 현지 사람들은 아미산이라 부른다. 성의 북쪽으로는 양지바른 곳에 회인 향교가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조선조 마지막 성리학자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선생의 학문이 농익던 풍림정사(楓林精舍)가 길가에 위치해 있다.
 회인의 꼭지점 역할을 하고 있는 매곡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이다. 동쪽으로는 완만하고 서쪽으로는 깎아지른듯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성 둘레가 695m에 불과한 작은 반월형 산성이나 이 성은 백제때부터 고을의 치지(治址:행정의 중심지)이고 현감이 춘추로 산제(山祭)를 올리던 곳이다. 주민들은 이 성을 중심으로 성밖에 살았으며 지배층은 성안에 거주한 성읍국가(城邑國家)의 어떤 시원적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 성의 또다른 특징은 드물게 석축과 판축을 겸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돌로 쌓은 석성과 흙으로 쌓은 토성이 손을 잡고 있는 셈이다. 경사가 급한 서쪽 벽은 석성이고 동쪽으로는 토성을 쌓을때 나타나는판축(版築)이 보인다.
 남쪽 성벽에서는 석성과 토성의 연결부위가 조사되었는데 조사전에는 이를 남문터로 보았다. 그러나 조사후 이곳은 남문터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혼동을 가져온 것은 지난날 객토사업때 성벽이 깎여나가 마치 문터처럼 보였던 것이다.
 지금도 남쪽 서쪽벽에서는 석축 흔적이 남아 있어 산성임을 금세 알 수 있으나 동북쪽으로는 거의 허물어져 형태만 희미하다.
 양의 창자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매곡현을 지키던 이 산성엔 후백제의 공직 장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매곡성주를 지낸 공직은 932년(태조15년) 고려로 귀화하여 개국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매곡산성 아래로는 회인현의 객사, 인산관(仁山館)이 겨울바람을 맞으며 회인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이 건물은 회인현의 동헌이 아니라 관리들이 지방출장시 머물던 객사다.
 객사 지붕 내림마루엔 잔설이 띄엄 띄엄 머무는데 산성과 향교의 중간지점에서는 청주~상주를 잇는 내륙고속도로 교각 공사가 굉음을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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