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서 겨울이 동면을 하다 부시시 잠을 깬다. 사미승이라도 있는 암자라면 향불에 고드름이 녹아내리고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칼바람에 풍경소리도 더러 들려오련만 주인잃은 폐사지(廢寺址)에는 불목한이 조차 얼씬 않는다.
 샨데리아처럼 지붕위에 연봉(蓮峰) 장식까지 하고 금빛 찬란한 법당의 금동불상이 염화미소를 띠던 큰 절집엔 목탁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소복소복 내리는 새아침의 눈소리가 법어를 대신하는걸까.
 충주시 신니면 문숭리, 산골짜기를 몽땅 차지하고 있는 숭선사지(崇善寺址)엔 용마루끝 치미에서 용트림하던 봉황은 보이지 않고 고요바람만 몰려온다. 스님이 살지 않는 옛 절터엔 바람따라온 구름이 눈을 뿌려 어디가 금당이고 어디가 회랑인지 구분조차 안간다. 다만 발굴조사 당시 쌓아놓아둔 기와조각이 눈발을 머리에 이고 있어 이곳이 숭선사지임을 짐작케 한다.
 속리산 법주사나 단양 구인사에 비한다해도 결코 그 규모가 작지 않은 천년대찰이건만 세월의 무상함 속에 5백년이나 묻혀 있었으니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질만도 하다.
 그 오랜 역사의 잠은 충청대박물관(책임조사원 장준식)의 세번에 걸친 발굴조사 끝에 비로소 깨어나면서 성격이 밝혀졌다. 이 절은 고승이나 신도들에 의해 지어진 여늬 절과 달리 고려의 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충주의 호족인 유긍달(劉兢達)의 딸은 태조 왕건의 세째 부인이 되고 그 사이에서 태어나 고려의 기반을 든든히 한 광종(光宗)은 충북과 여러모로 인연이 깊다. 광종은 그의 어머니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의 명복을 빌기위해 어머니의 고향인 이곳엔 원찰(願刹)을 지었다. 또 청주백화점 앞 광장에 서 있는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제41호)도 광종 13년(962)에 건립한 것이니 그 역사의 함수관계를 아무래도 되짚어봐야 할 것 같다.
 숭선사지는 3차에 걸쳐 중창을 하고 가람배치를 다시 하였다. 광종 5년(954)에 절을 세우고 명종6년(1182)에 1차 중창을, 그리고 조선 선조 12년(1579)에 2차 중창에 나선 것이다.
 금당터에는 이를 말해주듯 절터가 오버랩된 형태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가람배치가 남북자오선에 맞춰 일직선으로 배치되었다가 1차 중창에선 동서축으로 축선이 전환되고 2차 중창에선 다시 남북축으로 환원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금당터를 비롯한 회랑지의 아랫부분 기단석을 보면 화강암을 정성스럽게 다듬어 몇단을 쌓았다. 금당앞 탑지(塔址)를 보면 중앙에 가로 186cm, 세로 110cm,두께 36cm의 거대한 받침돌(심초석)과 주변에 여러 기단석이 있어 초창기에 나무로된 목탑(木塔)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축대를 쌓고 잔돌을 바닥에 깔아 다져 만든 배수로 등을 보면 이 사찰에 얼마만큼 넉넉한 불심이 작용됐나를 이해하게 된다. 남쪽 석축은 장대석을 5cm씩 들여쌓기로 축조하여 사람이 계단을 옆으로 올라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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