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계단 한 계단 풍경과 추억이 깃드는 곳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사월의 봄바람이 잠든 꽃을 흔들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꽃이 입술을 열었다. 주름진 눈가에도 손끝에도 발끝에도 연분홍으로 가득하다. 바람에 흔들리는가 싶더니 햇살을 머금고 한 잎 두 잎 꽃잎을 떨구기 시작했다. 욕심 많은 세상, 잡다한 생각과 욕망을 하나씩 부려놓으라 한다. 꽃잎을 떨군 자리에 씨앗이 터를 잡듯이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은 수암골을 서성거렸다. 꽃 한 송이를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고 텅 빈 충만을 느끼듯이 골목길에서 지나온 날의 추억과 새로운 날의 희망을 찾는다. 한 계단, 두 계단 발을 옮길 때마다 진한 꽃향기 속에 시리고 아팠던 지난날이 새 순 돋듯이 피어난다. 까치발을 하면 오종종 예쁜 뜨락이 나그네를 반긴다. 타인의 삶을 훔쳐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하나의 풍경일 수 있지만 그 속살을 이해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수암골이 그렇다. 6·25전쟁의 피난민촌으로, 서민들의 달동네로 고단한 노정을 견뎌온 보금자리다. 여느 사람들처럼 사랑을 찾으려 했고 자식농사 제대로 지어 풍요의 세상을 만들겠노라 다짐했다. 새벽에 일어나 늦은 밤까지 남들보다 몇 곱절 더 많이 일을 해야 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원한을 품는 일도 없다. 이 모든 것이 운명이니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는 것도 사치일 뿐이었다. 외롭지도 않고 헛헛하지도 않았다. 되레 살아온 날들이 장하고 대견할 뿐이니 황혼이 된 지금 수암골 사람들은 저마다의 숲과 삶의 마디를 간직하고 있다.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수암골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지역의 화가들이 이곳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주민들의 애달픈 삶의 풍경을 돌계단과 담벼락에 담으니 낡고 허름한 공간에 볕이 들었다. 여기에 '제빵왕 김탁구', '카인과 아벨', '영광의 재인' 등의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인기를 끌면서 도시 사람들이 낯선 풍경을 담기 위해 몰려들었다. 제빵왕 김탁구는 청주를 대표하는 빵집인 서문제과의 창업정신이 담겨 있다.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을 만들라는 정신 말이다. 그래서 지금도 서문제과의 빵은 크고 맛있다. 우동은 둘이 먹어도 될 정도로 풍성하다.

연탄은 달동네의 상징이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겨울을 견디기 위해 연탄에 불을 지피고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아스라한 희망을 갈망했을 것이고 남루해진 가슴에 영원히 식지 않을 온기를 담았을 것이다. 수암골은 지금 그 추억과 감동을 그대로 담아 연탄이 미디어아트로, 문화상품으로, 캐릭터로, 동화나라로 새롭게 탄생했다. 누군가의 꿈이 되고 존재의 이유가 되었을 것인데 나는 골목길의 연탄재를 발로 차고 침까지 뱉지 않았던가. 골목길 평상에 앉아 조곤조곤 이야기 나누는 노인들의 풍경을 보니 왠지 나의 가벼운 삶이 부끄럽다.

수암골은 토정 이지함의 전설과 와우산성의 흔적을 품고 있는 우암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그 풍경이 소담하고 햇살은 빛난다. 마음의 평화가 깃드는 사찰도 있고 벚꽃은 무진장 피고 진다. 땀 흘리고 기도하는 정직한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훼손되거나 경제논리에 점령당하면 안 된다. 수암골의 진한 삶이 가슴을 울리고 힐링의 메신저가 될 수 있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역사적 기억 없이는 그 어떤 아름다움도 없기 때문이다. 하여 수암골 여행이 지혜로 빛나고 감성으로 물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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