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세월, 이야기가 빚은 아름다운 비경

옥화구곡

인간에게는 유목민이라는 원시성이 있다. 삶이 고단하고 피곤할 때면 회색도시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험한 세상에서는 놀이와 게으름도 전략이다. 삶의 쉼표가 있고 여백의 미가 있으며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삶의 본질과 그리움을 찾아 길을 나서는 것이다. 인간이 가장 행복했던 시대는 세상을 무대로 마음껏 희망하던 유목민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배고프고 괴로운 시대에 살아서일까. 심산한 삶에 돌파구가 없다고 생각할 땐 어김없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옛 추억과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는 별들을 생각한다. 맨발로 시골길을 걸어도 좋고, 논두렁 밭두렁에서 촐랑대도 좋고, 숲길과 실개천을 팔짝거려도 좋다. 자연은 항상 정직했다. 어머니의 가슴처럼 두 팔 벌려 맞이했다. 이따금 세월에 지치고 남루한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때마다 자연은 돌아온 탕자를 기꺼이 허락했다.

오늘은 옥화9경으로 소풍을 다녀왔다. 물길, 들길, 숲길, 마을길이 함께 굽이굽이 흐르는 곳이다. 태초에 빛이 있었고 숲이 있었으며 계곡과 하천이 있었다. 그 속에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꽃들과 나무가 있었다. 사람들은 날짐승 들짐승과 함께 같은 길을 걸었고 같은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림자는 그저 소리없이 물길을 따라 흐르다 부서지고 또 모아졌다가 부서지곤 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웃는 듯 우는 듯 아름답고 예쁘고 군더더기 없어 더욱 좋다.

14㎞의 물길이 이어져 있는 옥화9경은 자연과 세월이 빚은 아름다운 그 자체다. 겨우내 움츠렸던 들판은 만삭의 여인이 몸을 풀 듯 부풀어 오르고 들뜸으로 가득하다. 바람의 현을 타고 일렁이는 갈대의 순정, 생성과 소멸이 끝없이 교차하며 쉼 없이 물길을 만들어 온 은빛 호수는 끝없이 마을을 품고 숲과 계곡을 품으며 설렁설렁 넘어간다. 그렇게 억겁의 세월을 보냈으리라. 견딤이 쓰임을 만든다. 그 많은 시간을 견뎠기에 상처가 깊고 사랑이 여울지며 또다른 길을 찾아 나선다.

용소대
천경대

하늘 높이 솟은 장대한 바위와 차디찬 동굴의 신비로 가득한 청석굴, 구슬처럼 맑은 호수에 용이 살았다는 용소, 달빛과 사람의 마음까지 비춘다는 천경대, 선비들이 시심에 젖었던 옥화대, 비단같은 봉우리 금봉, 천년의 신비로 가득한 금관숲, 전설에 젖고 물살에 젖고 슬픔에 젖는 가마소뿔, 신선이 놀다 가는 신선봉, 비취빛 호수와 붉은 숲의 비밀을 간직한 박대소…. 이처럼 옥화9경은 신화와 전설이 있고 물길따라 숲과 들과 마을이 천년의 비경을 품고 있다. 고단한 시대에 맑고 향기로운 감성을 주는 곳이다.

옥화9경은 스토리텔링으로 가득하다. 우암 송시열은 화양계곡을 넘나들 때 이곳에서 머물며 학문에 정진했다. 이중환은 이곳을 다녀간 뒤 '택리지'를 완성했다. 지금도 전국의 풍수지리 학자들과 전문가들에게는 반드시 다녀가야 하는 곳이다. 그 경치가 빼어나 한 때는 신혼여행지로도 으뜸이었다. 온양온천, 수안보, 속리산, 그리고 옥화9경이라고 할 정도였다. 징검다리는 물론이고 출렁다리를 건너는 기분 삼삼하다. 겨울 한 철 빼고는 천렵과 물놀이로 하루해가 짧다. 일과 놀이의 문화야말로 우리 문화의 진수가 아니던가. 물이 깊은 곳에는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도록 했으며, 물살이 사나운 곳에는 수력으로 전기를 끌어올렸다. 시골 사람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수달, 황쏘가리, 원앙 등의 천연기념물은 얼마나 많던가.

옥화구경 금봉

누가 그랬던가. 농촌의 풍경 중에 으뜸은 시골 사람들의 인심이라고. 마음의 현이 흐르는 강물처럼 낭창낭창 반짝인다. 그러니 문 열어라 꽃들아, 트림하는 대지야, 징검다리 악동들아, 춤추는 새들아, 푸른 강산아.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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