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에서 임금과 신하들간에 대표적 토론의 문화는 경연(經筵)에 있다. 중국 한(漢)나라에서 부터 시작된 경연은 임금이 학문을 닦도록하는 어전 강의로 당(唐), 송(宋)에 승계되었다.
 고려 예종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무신난때 폐지되었다. 조선조에서 경연은 꽃을 피웠다. 임금이 경연에 참석치 않으면 신하들이 들고 일어났다. 경연의 우선 목적은 군왕으로서 학문과 자질을 닦는데 있었으나 회를 거듭하면서 대표적인 정치 협의기구로 발전하였다.
 수직적 구조의 조선사회에서 왕과 신하가 나란히 하며 학문과 국사(國事)를 논했다는 자체부터가 무척 파격적(?)이었다. 봉건사회에서도 왕과 신하간에 의견을 교환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다름아닌 경연이었으니 요즘 말로 바꾼다면 ''토론의 정치''에 해당하는 것이다.
 경연의 기록보유자는 영조(英祖)다. 노론, 소론 싸움에 진절머리가 난 영조는 당파를 적당히 저울질하면서 능력위주의 인사를 발탁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 정책을 펴 나갔으니 이것이 이른바 탕평책이다. 학력파괴, 연줄끊기 등 오늘날 인센티브 제도나 메리트 시스팀은 서양의 제도에서 원용한 것만은 아니다.
 영조는 재위 52년간 모두 3천4백58회의 경연을 펼쳤다. 연평균으로 치면 66회요, 달로 따지면 매달 6회정도의 경연을 연 셈이다.
 영조의 개혁은 여러군데서 나타난다. 형정(刑政)을 혁파하여 무릎 사이로 막대기를 끼워 조이는 압슬형(壓膝刑), 불로 지지는 낙형(烙刑), 포도청에서의 난장(亂杖)을 금하였다. 장 80대~1백대에 처하면 단순한 ''매''쯤으로 여길지 모르나 실제로 이 매를 맞고 살아남기가 매우 힘들다.
 탕평책과 더불어 균역법(均役法)의 실시는 획기적인 조치였다. 이런저런 세제를 실시하여도 양반과 세도가들은 그 망을 번번히 빠져나갔다. 영조는 균역법을 실시하여 납포량을 1필씩 줄이고 그 대신 어염세, 결전세(結田稅)를 받아 부족분을 보충하였다.
 청계천의 바닥을 긁어낸 준천 작업과 함께 탕평책, 균역법 실시는 영조의 삼대치적으로 꼽힌다. 이조전랑(吏曺銓郞)은 말직이었으나 삼사(三司) 언관(言官)들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언론권을 대신들로 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이같은 권한을 주었던 것이다.
 1773년에는 경희궁 건명문(建明門)에 그 유명한 신문고를 매달아 백성들의 억울함을 경청하였으니 오늘날로 치면 청원이나 탄원서에 해당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헌정사상 처음으로 일선 검사 40명과 한자리에 모여 검찰 인사및 개혁방안에 대해 공개 토론을 가졌다. 대통령과 평검사가 공방을 펼친 토론회는, 제왕적 대통령 시절 같으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비록 원만한 접점은 찾지 못했다 치더라도 토론의 정치문화가 숙성되어 간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정치발전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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