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컨텐츠진흥팀장

영화 '파파로티' 한장명 / 뉴시스

연단위에 올라서자 아득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는지, 어디에 시선을 주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요동쳤고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으며 오줌까지 지렸다. 외웠던 단어는 내 머릿속에서 사라졌고, 객석에 있는 몇몇 사람들의 야유가 몸과 마음을 혼미하게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시골 소년은 난생 처음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무대에 올랐다가 입 한 번 열지 못하고 초라하게 물러서야 했다. 두 번 다시 무대에 오르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친구들이 비아냥거릴 것을 생각하니 더욱 부끄럽고 속상했다. 청주 중앙공원에 위치해 있던 시민회관에서의 일이었는데 소년은 그날 시골에서 볼 수 없었던 거칠고 냉혹한 세상을 맛보았다.

무대에서 내려온 소년은 온 몸이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막막했다. 바로 그 때 곁에 있던 선생님이 소년의 손을 꼭 잡더니 "야, 단상에 서 있는 모습이 멋있었어. 오늘은 너의 진가를 발견했으니 짜장면 먹으러 가자." 짜장면을 먹으면서도 소년은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호랑이 선생님이 어느 순간 으르렁 거릴 것 같았고, 내일 아침 학교에 갈 것을 생각하면 면발이 목구멍에 넘어갈 일 만무했다.

그렇게 불안감에 젖어 있는 소년에게 선생님은 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얘야, 인생은 겪는 것이란다. 기쁜 일도 겪고 슬픈 일도 겪으며, 좋은 일도 겪고 원치 않는 일도 겪게 마련이란다. 겪으면서 자라고 견디면서 더 큰 열매를 맺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 너의 듬직한 모습을 무대에서 본 것만으로도 만족하니 다음에는 더 큰 용기로 도전하자." 소년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짜장면을 먹었다. 그 날 이후로 누구보다도 책을 잘 읽었고, 단상에 오르면 세상의 모든 것이 소년의 것이었다. 고양이처럼 조근조근 이야기하거나 호랑이가 되어 큰 소리로 외치거나 독수리의 눈으로 응시하기도 했다. 꽃처럼 나비처럼 햇살처럼 낭창낭창 노래를 하거나 마음껏 희망할 수 있었다.

소년이 중학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때보다 학교의 규모와 학생 수가 몇 곱절 많았다. 누구 하나 내게 진로문제를 상담해주거나 내 인생의 멘토 역할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먹고 노는 것 말고는 혼자 알아서 해야 했는데, 소년은 쉬는 시간마다 책을 일고 글을 쓰곤 했다. 교실을 순찰하던 학생주임 선생님이 홀로 남아있는 소년 곁으로 다가왔다. 노트에 적힌 몇 개의 시와 수필을 읽어보더니 "글밭이 참 좋구나. 작가를 해도 되겠다"는 짧은 말씀을 던지곤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선생님은 당신께서 직접 쓰신 <시인의 집>이라는 책에 싸인을 한 뒤 내게 선물했다. "시인처럼, 시인이 되어, 시인의 세상을 만들거라"라는 글씨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시인이 되겠노라 다짐했다. 책을 읽고 더 높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며 글밭을 가꾸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직 시인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매년 책을 한 권씩 내고 있다. 죽는 그 날까지 내 키 크기만큼 책을 펴내기로 했다. 내 삶의 흔적을 남기고 지나온 날을 성찰하며 세상의 이야기를 담아 더 큰 미래를 열기 위함이다.

세계적인 부호 워런 버핏은 "내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으면 가장 먼저 사자밥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적응력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의 성공비결을 이야기했다. 시대를 잘 만났고, 그 시대적 환경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며, 수많은 시련을 딛고 창조의 가치를 펼쳐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컨텐츠진흥팀장

누가 말했던가. 역사적인 기억 없이는 그 어떤 아름다움도 없다고. 인류의 빛나는 역사는 한결같이 아픔을 기념하고 있다. 위기의 순간마다 절망하지 않고 새살 돋는 성장통을 허락했기에 가능했던 것들이다. 내 인생을 바꾼 한 마디를 생각하면 가슴이 짠하다. 하여, 내가 그 한 마디에 새로운 희망을 찾았듯이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는 노둣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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