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컨텐츠진흥팀장

위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함이며 해당 칼럼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클립아트코리아

가을엔 스치는 것이다. 스쳐서 스미고 물들며 젖는 것이다. 낙엽에 스치고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햇살은 대지와 사람들의 발걸음에 스치는 것이다. 낯선 사람이 지나갈 때 살짝 스치기만 해도 억만년의 인연이 되는 것이다.

이른 새벽, 어둠이 가시기 전에 성당길을 걸었다. 어둠에 스치고 이슬에 스치며 풀섶에 스쳐 다다르니 물안개가 가득했다. 다시 걸었다. 황금들녘이 눈부시게 빛나는가 싶더니 하나 둘 수확의 기쁨으로 볏단들이 논바닥에 누워 있었다. 다들 안녕하신가 인사를 했다. 그 속에 잠겨있던 들녘의 풀내음과 흙내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추가 익어가고 감나무엔 붉은 홍시가 가득하다. 논두렁의 서리태도 까불거리고 텃밭의 채소는 잎과 뿌리에 물이 가득 차 있다. 저게 그냥 익어갈 리 없다. 수많은 시간을 견디고 비바람을 딛고 일어났기 때문에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입안에 단내가 가득하고 침이 샘솟는다. 그래서 가을엔 스치는 것이다. 성당에서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사랑하게 하고 감사하게 하며 서로를 보듬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각다분한 세상에 평화가 깃들고 삶의 여백을 달라며 기도했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가. 이 순간, 고백하고 성찰하며 새로운 디딤돌이 될 수 있게 허락할 것을 간청했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레처드 세일러는 행동경제학을 웅변했는데 그 시작은 '넛지(nudge)'라고 했다. 넛지는 팔꿈치로 상대방을 꾹꾹 찌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말로 스미는 것, 스미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지나친 간섭과 개입은 갈등과 대립과 반목을 불러올 수 있지만 적당한 거리에서의 관계는 삶의 향기가 있다.

스치면 스며들게 돼 있다. 머리에 스며들고 몸 속 깊이 스며들며 마음에 스며드는 것이다. 그리고 스며들면 물들고 젖는 것이다. 삶이 되고 문화가 되며 예술이 된다. 스쳐가는 것 하나하나가 풍경이 되고 추억이 되며 사랑이 된다. 그래서 가을엔 스치는 것이다.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수많은 사람들과 다투고 경쟁하며 차별하고 미워했던 지난 날,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해 내 삶에 먼지 푸석거리던 지난날의 파편은 흐르는 강물에 띠배 하나 만들어 떠나보내자. 미련도 사치다. 미련없이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다. 저 숲의 나무들처럼 말이다.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컨텐츠진흥팀장

텅 빈 마음,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하찮았던 돌부리에 생기가 돌고 떨어져 나뒹구는 낙엽이 춤을 추며 바람이 말 걸어오면 모른 척 하지 말자. 가을볕 속으로 자박자박 걸어가 손잡고 노래하며 춤을 추자. 소년이 되어, 시인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의 꿈은 저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별이 빛나는 멋진 집을 짓는 것, 사다리를 만들어 별나라로 가고 그 별 하나를 내 마음에 담자. 꿈꾸는 소년이 아니라 꿈을 노래하고 꿈을 향해 춤추는 악동이 되자. 다함께 모여 가을 잔치를 하자.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합창을 하자.

시인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희망이 되자. 나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받기만 했을 뿐 누군가의 희망이 된 적이 있었던가. 대지를 향한 짧은 입맞춤, 돌아오지 않을 이 순간에 대한 경배, 자유를 향한 힘찬 날개짓, 그리고 가슴이 뛰는 사람이 되자.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누군가의 희망이 되자. 그리하여 가을엔 스치는 것이다. 스쳐서 스미고 물들며 젖는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가장 아름다운 날은 자연 속으로 한 발 다가설 때, 이웃 속으로 한 발 다가설 때, 그리고 굳게 닫혔던 마음의 빗장을 풀 때 오는 것이다. 지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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