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시체다. 핏기 발한 누렇게 뜬 우람한 집채 덩어리. 한때 청주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었던 이곳 연초제조창. 창조적 예술로 표현되는 가치는 꾸미지 않은 낡은 둥지에서 빛을 더 발하나 보다. 숨 죽은 회색 콘크리트 덩어리가 장고한 고사목 같다.

축제장 안은 잘 정돈된 공간이 길게 늘어지고 그 양쪽으로 명작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쾌쾌한 콘크리트 벽에서 비치는 전등 불빛에 작품은 더 빛이 난다. 옻칠 젓가락, 금수저 은수저, 고서, 도자기, 바느질, 붓, 목판인쇄 등. 외곽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질서정연한 모습에 사람들은 의아해 한다. 냉혈이 흐르는 회색 굴 속에서 한 중 일 차 문화의 특징을 전시하고 그에 따른 차를 선택하여 모든 사람들과 따뜻한 마음을 향유하는 일에 마음이 분주하다.

노랑머리에 파란 눈, 까만 피부에 검은 눈, 중국, 일본 사람들이 얄궂은 표정으로 미로 속을 활보한다. 뽀글거리는 머리를 정수리 위로 올린 두툼한 입술의 흑인 여성이 작품 앞에서 서성인다. 몸속의 피가 다를 것 같은 색목인의 등장과 각국의 사람들이 축제장의 좁은 공간에 그 나라의 문화에 심취하는 자유분방한 모습에서 문득 당시대(唐代)를 연상한다.

약용이나 식용으로 마셔왔던 차를 음용 문화로서 발전시킨 당시대. 당연히 정치 경제 문화가 화려했을 터. 그 당시 수도였던 장안(長安)의 거리는 지금 이곳처럼 반듯했고 도시는 인구 백만으로 인종 전시장과 같았단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개방적이었던 당시대. 차를 문화로서 승화시키고 그 가치를 빛내주었던 당나라. 하여, 국제적인 문화의 산실이 되었다던 당시대의 차 문화를 이곳 젓가락 축제에서 연상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그것은 공유하고 존중하는 글로벌 문화에 차의 새로운 역할을 기대하는 마음이 커서가 아닐까.

차 자리 맞은편, 명인의 손길로 커다란 옹기가 빚어지고 있다. 흙을 빚어서 일주일간 쌓아 올린 옹기 항아리가 사람의 키보다 더 크다. 10일간 우린 찻물을 저항아리에 부으면 넘칠까? 모자랄까? 한복에 차향이 짙게 베이고 낯빛이 차색으로 변해버린 교육원 선생님들의 노고를 함께 한다면 넘치고 넘쳐 강으로 바다로 흐를 것 같다.

매일 차 한 잔으로 아침을 여는 스태프들, 명장, 그리고 관람자들. 추워서 한 잔, 피곤해서 한잔, 차분위기가 정겨워서 한잔 하는 이곳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참새 방앗간이다. 생명의 문화 생명의 교육이 꿈틀거리는 축제에 한껏, 원 없이 차를 나누었다. 문화의 소통으로 사랑으로 공유할 수 있다는 일의 자부심에 무척 기뻤지만 마음 한구석이 쓸개 빠진 녹차처럼 맹맹한 것은 왜일까.

차가 문화로서 가치를 누린 것은 한 단계 더 높은 삶을 누리고자 하는 정신적인 사유가 있었

정지연 국제차예절교육원장·다담선 대표

기 때문이다. 차 문화가 융성했던 고려시대는 나라의 큰 행사에 앞서 '진다의식(進茶儀式)을 행했다. 의식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찾고 예를 배우는 행위적 도구였으리라. 그래서 한국의 차는 다례라고 하는 의미도 있다. 트렌드에 따라 차 문화도 변화하지만 차를 마신다는 의미가 목을 축이는 것에 급급해하는 요즘, 차의 본질을 잃을까 염려된다. 좀 더 진중한 차 자리를 통해 모든 사람이 참된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 나눔과 배려가 충만한 창조학교에서 차의 진면목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차 자리를 원한다면 나의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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