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연의 차 이야기] 20. 청차 같은 날

산성에 올랐다. 알싸한 겨울 내음이 코끝에서 가슴으로 파고든다. 티끌 하나 없는 파란 하늘은 더없이 청정한 겨울 산의 정점에 머물고 시린 하늘 아래 통통하게 물오른 목련이 솜털을 비집고 고개를 내민다. 아직은 못다 한 겨울 이야기가 남았는데. 겨울은 그새 하얗게 식어가고 있었다.

상봉재를 지나 산성으로 가는 길은 하얀 눈이 실크로드 같았다. 스틱을 꼽고 엉금엉금 걸었다. 혈기왕성한 때, 나보다 더 큰 배낭을 등에 메고 명산을 찾아다닌 저력이 세월의 더께에 시나브로 삭아들었다. 겨우내 춥다고 고이 모셔놓기만 했던 몸이 더 이상 못 간다고 손을 내민다. 헉헉대며 들숨 날숨을 몰아쉬니 어지럽기까지 하다. 산성으로 가는 출렁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약수터의 통나무 의자에 앉았다. 얇고 긴 햇살이 온전히 내려앉은 산. 정체됨 속에서 오롯한 겨울 향기가 살얼음 끼듯 올라왔다.

후회막심하다. 산성 한 바퀴, 잠깐 다녀온다고 물 한 병 준비하지 않았다. 약수터의 물은 마시지 말라는 표기다. 평소에 즐겨지니던 차도 우려 오지 못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희끗한 산을 바라보았다. 쨍쨍한 바람 한 점이 목구멍으로 훅 들어온다. 선뜻하다. 뻐근했던 사지가 녹녹해지고 등이 서늘해진다. 이 선뜻함과 상쾌함. 엄마 뱃속에서 처음 나올 때가 이런 느낌일까. 마치 설산의 눈이 녹아 목구멍에서 맴도는 듯하다.

어렸을 때, 눈을 손으로 퍼서 먹거나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을 따서 먹었다. 마땅히 군것질거리도 없었지만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순수한 맛이 어린 마음에도 좋았던 것 같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엔 눈을 감고 양팔을 길게 펴 손에 닿는 눈의 촉감을 느꼈다. 눈은 닺는 순간 물이 되어 손금을 타고 길게 퍼져나갔다. 간지럽게 녹아나는 물을 혀로 핥았다. 시원하고 달큼했다. 요즘도 명품의 청차(靑茶)를 마실 때는 눈이 입에서 녹는 것 같아 옛일을 생각하곤 한다.

향으로 차의 가치를 따진다면 청차만한 것이 있을까. 우롱차(烏龍茶)라 불리기도 하는 청차는 목 넘김이 부드럽고 신선하며 풍미가 깊고 냉철하다. 그러니 세계인이 즐겨 하는 10대 명차 중 으뜸일 수밖에. 사람으로 표현한다면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 해야 할까. 복건성 민남의 안계현이 발원지인데, 대만 남투현(南投縣)의 고산지에서 나오는 대우령, 복수산, 산림계, 리산, 아리산 등의 차를 선호한다. 15~70% 발효도의 차이만큼 종류가 다양하다. 길쭉한 모양의 조(條)형도 있지만 주(珠)형으로 구슬 같거나 잠자리 머리 모양같이 둥근 차는 그 맛도 섬세하고 내포성이 깊다.

해발 2000m가 넘는 차 고산지는 일교차가 심하고 운무가 가득하다. 햇빛, 바람, 이슬이 산야를 넘나드는 대자연의 향연 속에서 찻잎은 푸르게 물든다. 천혜의 환경에서 노니는 산소 같은 찻잎이 우주의 향을 머금고, 이틀이나 걸려 만든 인고의 향까지 품었으니 그야 말로 주련벽합(珠聯璧合)이 아닌가.

산성 남문을 지나 돌로 쌓여있는 뚝을 걸었다. 바람 타고 울어대는 소나무 소리 차갑고 얼굴을 감싸고 지나가는 나그네의 마음도 여여한날. 녹차같이 푸른 나무, 홍차같이 붉은 태양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산성에 서있으니 마치 소우주에 서있는 듯하다. 파란 하늘에서 맑은 이슬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날이다. / 국제차예절교육원장·다담선 대표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