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연의 차 이야기] 21.구정다례(茶禮)

새해 첫날, 아침 밥상이 풍요롭다. 떡국, 전, 갈비, 물김치, 잡채, 약식, 식혜 등, 여백 없이 꽉 채워진 밥상을 보니 먹은 듯 배부르다. 추도예배 상으로 구정 차례를 대신하는 자리에 시아주머니의 주 예수 기도 주문이 거실을 가득 채운다. 조용한 가운데 실눈을 뜨고 주변을 살피다 아버님과 눈이 마주쳤다.

3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난 끗발 없는 남편을 만난 것도 복이었다. 집안의 대소사는 거의 큰형님이 책임을 지시니 막내며느리인 나는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런 나를 보는 주변의 지인들은 명절증후군을 모르고 사는 행운아라고 부러워한다. 또 아들이나 딸들이 명절 인사를 왔다 가면 아예 병원에 입원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직은 그조차도 모르고 사니 얼마나 편한 여자의 일생인가.

밥상을 치우기도 전에 아버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다과라도 드시고 가시라고 했지만 막무가내이시다. 그럴 수밖에. 위폐를 모셔놓고 조상님들에게 정성껏 만든 떡국을 올려야 했거늘, 생뚱맞게 주예수를 찾는 것으로 대신하려니 끓는 그 심사를 어떻게 감출 수 있을까. 떡국이 모래알 같았을 것이다. 더구나, 오늘은 평소의 기제사와는 다른 일 년 중 한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뜻 깊은 명절차례가 아닌가. 문을 닫고 나가시는 아버님의 처진 어깨가 쓸쓸하다.

늙은 호랑이 이빨은 빠져도 아버님은 예외일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분이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 백기를 드셨다. 유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삶의 지존으로 이어져왔던 조상님의 얼을, 3대 독자가 짊어지고 가야 할 평생 업과 짐을, 가슴속에 파묻고 부부 목사인 큰아들 내외에게 제사의 권한을 내어주셨다. 제사를 극진히 모시는 일을 효도라고 여기며 살아온 나는 아버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조차 없다어머님도 교회의 권사님으로 열렬한 활동을 하고 계시니 이래저래 전통을 숭상하는 아버님의 의식 철학은 세월 따라 강물 따라 흘러가버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속절제(俗節祭)라고도 하는 명절 차례는 그 계절에 나오는 음식을 큰 쟁반으로 올리고 나물과 과일을 섞어 의식과 예를 행하는 관습에 술과 차를 함께 올렸다. 설날과 추석의 명절 아침에 조상에게 올리는 제례의 의미가 곧 다례(茶禮)이다. 조상에 관한 교훈과 업적을 기리고 자손들이 모여 서로 간의 화합과 일체감을 조성하여 부모와 친족의 어른을 공경과 정성으로 대하는 효의 실천이었다. 이렇게 정갈한 생활을 통해 사람의 인성을 기르고 예를 배워나가는 것이 차례가 주는 메시지가 아니었던가.

요즘의 명절 차례는 어떤가.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의 반가운 인사 대신 항공사가 성수기를 맞는 항공 풍년의 시대이다. 언젠가 마트에서 휴대용 제기를 보았다. 조상님의 은덕도 기르고 새 문물을 탐험하는 즐거움도 누려야겠기에 먼 타국에서 조상님의 혼백을 부른다. 생전 가보지 못했던 외국의 문물을 흠향할 수 있어 기뻐하실까, 아님 타국에서 길을 잃어 제기용 그릇과 함께 위리안치될까.

정지연 국제차예절교육원장·다담선 대표

종교를 갖는 목적은 행복을 위해서라고 한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가족이 평온하다면 의미는 있겠다. 하지만 그 한사람이 받는 상처는 누군가의 죄가 될 것이 분명하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님 댁에 들렸다. 빈방에 위폐와 향내음이 농후하다. 조상님과 자식 중, 어느 한쪽도 버릴 수 없는 아버님의 깊은 사랑을 엿보았다. 아버님의 가슴에 따뜻한 차 한 잔 올리고 싶은 설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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