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위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함이며 해당 칼럼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클립아트코리아

어느 회사 입사시험에서 논술 답안지를 채점한 적이 있다. 충격이었다. 내용이 풍부하거나 부족해서가, 논리가 정연하거나 그렇지 않아서가 아니다. 글씨 모양 때문이었다. 난필과 악필이었다. 합격자를 가려야 하니 대충 읽을 수가 없었다. 눈에 힘을 주고 읽었지만 반도 지나지 않아 포기해야 할 답안지가 많았다. 채점자들은 한 동안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작은 글씨와 큰 글씨를 마구 섞여 눈의 혼란을 가져왔다. 비 온 날 시골 진흙 마당에서 뒷짐을 지고 작대기를 끌고 다녀 땅에 엉성하게 간 줄보다 별반 낮지 않았다. 문장 줄이 올라가면 끝을 모른 채 돌아올 줄 몰랐다. 내려가면 역시 계속 내려갔다. 직삼각형 빗변과 같았다. 이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문장 줄이 상하로 오르락내리락 춤 추기도 했다.

이 답안지의 주인공들은 대학 졸업생이다. 더욱이 글쓰기 분야 경력 4년 이상을 요구한 분야에 지원한 성인이다. 입학 논술시험을 봤고, 리포트를 작성했고, 글쓰기 분야의 경력이 있을 터인데 어찌 이리 글씨체가 엉망인가? 1960~70년대. 초등학교 때는 필기도구가 오로지 연필이었고, 중학교 때는 잉크 펜이었다. 볼펜이나 사인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구해 쓰려면 가능했다. 그러나 볼펜은 사용이 허가되지 않았다. 볼펜으로 필기를 하면 선생님한테 혼났다. 연필이나 잉크 펜은 사용하기 불편했다. 칼로 연필을 깎아야 했다. 손 베는 일이 허다했다. 질이 떨어지는 연필은 침을 자주 묻혀야 해 위생상으로도 좋지 않았다. 잉크는 툭하면 가방이나 책에 엎지른다. 잉크색은 주로 푸른색이어서 가방이나 책을 푸른색으로 물들였다. 주머니에 잉크병을 넣어 다니다 깨거나 새어 나와 교복마저 푸른 물감이 들기 일쑤였다. 자주 잉크를 찍어야 하는 불편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왜 이런 불편에도 연필과 잉크 펜을 선생님은 강요하고, 학생들은 고집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필기를 할 때 집중하고 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다. 글씨 잘 쓰기 위한 훈련이었다. 볼펜(Ball point pen)은 촉 끝 부분에 아주 작은 공이 들어 있다. 글씨 쓸 때 힘이 별로 들지 않는다. 볼펜 잉크통의 잉크가 소진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쓸 수 있다.

중국에서 글씨 쓰는 법을 서법(書法)이다. 한자는 상형문자에서 시작해 대전, 예서, 행서, 초서의 각종 서체로 변천했다. 시대와 학자별로 틀이 잡힌 서체와 이 서체에다 독자적인 서풍(書風)이 가미된 글자를 바로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서법이다. 한자 문화권 국가에서는 사자성어 등 잠언이나 시를 독자적 서풍에 담아 족자나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놓았다. 우리는 서예(書藝)라 했다. '글자 예술'이다. 중국 못지않게 우리 선조가 글씨체에 대해 정성을 들였다는 증거다. 우리 역시 글자를 '조형예술'로까지 승화시켰다. 글자가 균형이 조화로워 미묘(美妙)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서예 특징은 점과 선의 구성과 비례에 따라 공간미가 형성된다. 획을 긋는 순서에 따른 붓놀림의 강약 등으로 글씨가 율동미를 이뤄 마치 고운 선율의 음악이 흐르는 것과 같다. 서예의 글자는 주로 한자다. 필기도구도 연필이나 펜이 아닌 붓이다.

필기도구가 어떠하든 직접 손으로 글씨 쓰기, 수기(手記)가 사라지고 있다. 수기의 퇴보는 디지털 혁명이 가져왔다. 글씨를 직접 쓸 일이 없어졌다. 편지도 스마트폰 문자 메시지와 이메일이 대신한다. 리포트도 컴퓨터로 작성해 이메일로 전송한다. 기획안 작성부터 결재까지 모든 업무에서도 키보드가 주인공 역할을 한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천재는 악필이라 했다. 천재는 선천적으로 뛰어난 정신적 능력을 발휘한다. 쓰기가 생각을 절대 따라갈 수 없다. 수기가 머릿속 문장생성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얘기다. 천재, 둔재 모두 마찬가지다. 생각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글씨를 빨리 써야 한다. 글씨는 악필일 수밖에 없다. 글은 생각이나 일의 기록이자 학문이나 학식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보다 중요한 점은 글쓴이의 사고 전달이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천재가 아니라면 꼼꼼하게 읽기 편하게 써야 함이 옳지 않겠는가? 수기 훈련이 필요하다. 악필과 난필의 주인공들은 분명 천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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