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겁의 바위에 매달린 청풍 천년 고찰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의 정방사에 간다며 페이스북에 자랑질을 했더니 그곳의 똥간을 꼭 들르란다. 똥간이라. 고상한 말로 사찰의 똥간을 해우소(解憂所)라고 부른다. 내 몸의 찌꺼기를 토해내고 욕망과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찾는 곳이다.

해우소는 정방사 문지방에 있었다. 사찰 후미진 곳에 있어야 할 것이 문지방에 있다니, 묘한 기분에 문을 열었는데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앞뒤가 꽉 막힌 답답한 공간이 아니라 확 트인 열린 구조였다. 엉덩이를 까고 앉았다. 청풍호의 대자연, 그리고 4월의 햇살과 바람이 스며들었다. 눈과 귀가 맑아지는 것 같더니 자연의 기운이 온 몸으로, 심지어는 엉덩이 밑구멍까지 싸늘해졌다. 아, 극락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정방사는 억겁의 바위 위에 지어진 천년고찰이다. 아래로는 맑은 강과 푸른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하늘과 맞닿아 있고 별들이 쏟아지며 꽃들의 잔치 만화방창이다. 그래서 청풍의 맑은 기운(정·淨)과 꽃대궐(방·房)의 아름다움이 펼쳐진다는 뜻으로 정방사라 부른다.

이곳은 통일신라 문무왕 2년(662)에 의상대사 제자인 정원스님이 창건했다. 정원스님은 천하를 두루 다니며 수행할 곳을 찾던 중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깨닫는다. 제행무상.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모든 것은 단 한 순간도 멈춰있지 않음을 뜻한다. 의상대사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했다. 의상대사는 "내 지팡이의 뒤를 따라가거라. 지팡이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지으라.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 그곳에서 중생과 부처님의 하나됨을 전파하라"고 했다. 스님이 던진 지팡이를 따라가니 기암절벽과 맑은 호수와 푸른 숲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최고의 절경이었다.

정방사는 자드락길을 통해 가야 한다. 낮은 산기슭의 비탈진 땅을 자드락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이 길은 낮게 시작하되 높게 오른다. 청풍호를 굽이도는 82번국도 능강교에서 임도를 따라 2.6㎞ 남짓 숲길을 걷는다. 계곡과 숲과 기암절벽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아름드리 솔숲 사이로 굴참나무, 단풍나무, 상수리나무, 층층나무, 진달래 등의 다양한 수종이 숲의 벗이다. 그래서 이곳은 사계절 내내 푸르고 진하며 깊고 느리다.

정방사로 향하는 길은 능강구곡의 청정수가 흐른다. 흐르는 것은 모두 아름답다. 아홉 개의 소와 폭포를 품고 있다고 해서 능강구곡이라 했는데 조선시대 때부터 명승지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자드락길 중에 으뜸으로 꼽는다. 가족이 함께 걸으면 평화가 깃든다. 연인이 손잡고 걸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혼자 걸으면 삶의 여백이 생긴다. 그래서 트래킹 코스로 인기다.

산길을 따라 오르면 사찰 입구에 가파른 돌계단이 마중나와 있다. 여기부터가 바위 사잇길이다. 벼랑 끝에 무슨 사찰이 있을까 싶지만 거대한 병풍석 이래 가람이 옴팡지게 자리하고 있다. 사찰의 매력은 앞마당과 뒷마당을 어슬렁거리는 여백의 미에 있는데 이곳의 마당은 좁다. 원통보전과 요사채가 사찰의 전부다. 사찰 뒤쪽에는 기암괴벽 사이로 맑은 물이 쏟아진다. 앞마당에 서면 월악산과 청풍호가 한 눈에 들어온다.

산사의 처마에 풍경(風磬) 한 쌍이 마주보고 있다. 바다의 물고기가 하늘을 나는 새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뒤척였을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견딤이 쓰임을 만든다는 것을. 꿈을 빚기 위해 항상 눈뜸으로 견디며 지켜온 나날의 값진 시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람이 어깨를 스치기만 해도 풍경소리가 맑게 빛난다. 산과 들과 호수의 풍경이 내 안으로 스며들어와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일상의 형식을 부려놓는다. 텅 빈 마음으로 하나의 풍경이 된다.

여행 중에 가장 긴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라고 했던가. 생각해 보니 삶 자체가 기나긴 수행이다. 나는 정방사에서 오랫동안 머뭇거렸다. 그리고 내 마음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어느 날,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거든 내 애틋한 삶이 만들어낸 바람이라는 것을, 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 좋겠다.

글·사진 / 변광섭(컬처디자이너,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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