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중심가는 어떤 변천과정을 겪었을까. 상당구가 먼저일까 흥덕구가 먼저일까. 일반적으로 상당구가 먼저인 것 같지만 흥덕구의 손을 들어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청주의 다운타운을 찾으려면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설치된 서원소경(西原小京)의 치소(治所:행정의 중심지)를 찾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마을은 행정의 중심지를 따라 발달하기 마련이다.
 서원소경은 4년뒤인 689년,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되었다. 서원경 주변으로는 성(城)을 쌓았는데 그 성이 바로 서원경성(西原京城)이다. 관련학계에서는 서원경의 치소가 어디에 있었느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로서 확실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서원경의 치소는 대략 상당산성설, 우암산 토성설, 청주읍성설로 축약된다. 견해는 서로 다르나 이들이 모두 상당구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청주에 서원경이 설치되고 부터는 청주의 중심지가 무심천 동쪽에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통일신라~고려~조선을 거쳐 지난 1990년대 초까지는 상당구가 청주의 노른자위를 형성했다. 청주백화점 앞에는 용두사(龍頭寺)라는 신라말 고려초의 큰 절이 있었다. 절은 폐사되었지만 국보 제41호인 ‘용두사지철당간’이 절터임을 몸으로 증명해 준다. 조선후기에 간행된 청주읍성도에도 철당간은 선명하게 하늘로 솟구쳐 있다.
 청주읍성을 중심으로 아침 저녁으로 열리는 ‘저자시’가 청남문 밖에서 전을 폈고 정기 시장인 청주 장날과 상설시장인 육거리, 남주동, 서문동 재래시장이 오늘날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러나 서원경이 설치되기 이전인 삼한시대에는 오히려 흥덕구 쪽에 삶의 흔적들이 더 많다. 중부매일신문 앞 명심산 자락에는 마한(馬韓)의 실체를 밝히는 ‘백제 고분군’이 떼지어 있다. 이곳에서는 마한의 토기문화와 이른백제의 철기문화가 혼재되어 출토된다.
 마한의 호흡은 봉명동, 송절동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커진다. 송절동에서는 원삼국(原三國)문화가 아직도 숨을 쉰다. 비옥한 미호천 변에서 토기를 빚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청주사람들의 족적이 지문처럼 찍혀 있다.
 봉명동 농수산물시장 맞은편인 야산에서는 구석기 시대부터 신석기~청동기~초기철기 시대까지의 유적, 유물이 역사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수백기에 달하는 집터와 무덤은 바로 그런 흔적들이다. 어떤 학자는 이를 두고 ‘첫번째 청주시민들’이라고 부른다.
 역사시대로 진입하면서도 운천동, 봉명동 일대는 번영을 계속한다.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한 흥덕사를 비롯하여 운천동사지, 용화사의 전신으로 보여지는 사뇌사(思惱寺) 등 수많은 절터가 흥덕구 쪽에서 발견된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청주의 중심상권이 상당구서 흥덕구로 옮아가는 것을 보면 돌고 도는 역사의 회전 법칙을 실감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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