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있으면 별빛이 약하기 마련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청주 흥덕사본 ‘직지심체요절’의 이름 값에 치어 이보다도 앞선 충북의 목판본이 빛을 잃고 있는 것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은 지고의 가치나 은메달도 소중한 것이다. ‘직지’의 그늘에는 1305년 청주 원흥사 목판본 금강경과 이보다도 훨씬 앞선, 1058년(문종12)에 충주목에서 간행된 여러 의학서적들이 숨어 있다.
 충주에서 관판본(官版本)으로 간행된 의학 서적들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간행된 의학분야의 책들로 우리나라의 의학이 과학적으로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박문열, 고려시대 충북의 인쇄출판문화정책)
 상한론(傷寒論)은 외과 서적이며 본초괄요(本草括要)는 약초에 관한 것이다. 소아소씨병원(小兒巢氏病源), 소아약증병원일십팔론(小兒藥證病源一十八論)은 소아과 서적이고 장중경오장론(張仲卿五臟論)은 내과서적이다.
 조선시대에는 ‘동의보감’을 비롯하여 수도 없이 많은 의학서적들이 편찬되었지만 고려시대에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를 필사본이 아닌 목판본으로 충주에서 처음 간행했다는 사실은 예삿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인쇄문화 발전과 의학서적의 간행에 충주지역이 한 몫을 든든히 했던 것이다.
 충주에서는 이외에도 청룡사(靑龍寺) 사찰판으로 선림보훈(禪林寶訓), 호법론(護法論), 선종영가집(禪宗永歌集) 등 불서가 ‘직지’간행 직후인 1378~1381년 사이에 발간되었다.
 고려시대에 충주는 한때 사고(史庫)가 있었다. 고려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역대실록 부본(副本)을 지방에 분산 수장케 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충주다. 1381년(우왕 7), 보주(普州) 보문사(普門寺)의 사적(史籍)을 충주 개천사(開天寺)로 옮긴 일도 있었다.
 개천사 사고는 죽주(竹州) 칠장사(七長寺)를 오갔는데 그 존치 기간을 따져보면 1381년에서 1383년까지 모두 4년에 이른다. 충주사고는 중요서적의 보관과 더불어 지방의 출판문화를 일으키는데 간접적인 요인으로 작용을 했던 것이다.
 출판문화에 있어서 고려시대 역시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보였으나 평양, 경주지방에는 상당한 출판문화가 존재하였고 청주, 충주도 한 몫을 하였는데 이는 지방 분권화라기 보다 몽골난 등 외적의 침입으로 중앙 출판이 위축되었고 지방이 그 공백을 채웠던 것으로 풀이된다.
 조선시대에 음성에서 찍어낸 남연년(南延年)의 유고시집 남충장공시고판목(南忠壯公詩稿板木·지방유형문화재 제 218호)은 52판이 잘 남아 있으나 함흥차사로 유명한 박순의 판목은 잘 보존되지 못하고 극히 일부만 남아 있다. 소문으로는 아이들이 판목으로 썰매를 만들었다고 한다.
 아무튼 충주지역의 인쇄문화가 보통이 아니었음을 볼때 ‘직지’는 이러한 복합적 역사의 필연 속에서 탄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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