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중의 현장 속으로] 학창시절 학교 앞 그 많던 문구사는 다 어디로 갔을까

김애중 기록활동가·수필가·중부매일 시민기자

2025-07-15     김애중 시민기자
아직도 볼 수 있는 문구사 앞 풍경. / 김애중


[중부매일 김애중 시민기자] '보문당'은 어머니가 운영하던 문구사 이름이다. 나는 보문당 딸내미로 통했다. 작은 마을 시장 입구에 있었는데 과자나 껌, 생활용품도 함께 팔았다. 너나 할 것 없이 어렵게 살던 1970년대 시절, 친구들의 부러움을 산 것은 보문당에 군것질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설 땐 엄마 몰래 쫀디기 한 줄을 슬쩍 한다든지, 라면땅 한 봉을 잽싸게 들고나오는 모험을 즐겼다.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등짝으로 빗자루가 날아오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쯤,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문구사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땡볕에서 뿅뿅거리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미니카가 한참 유행일 때는 사달라고 길바닥에서 '땡깡'을 부리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오래전 문구사는 학용품보다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 추억의 상품이 가득하다. 좁은 가게 안에서 친구들과 어깨를 부딪쳐가며 요리조리 유리구슬이나 딱지, 카드 등을 구경하던 시절이 있다.

동네마다 학교 근처에 서너 개씩 성업을 이루던, 그 많던 문구사는 다 어디로 갔을까. 언젠가부터 하나둘 문 닫는 곳이 생겨나면서 남아있는 문구사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점점 사라지고 있는 공간이다. 학창시절 추억이 담뿍 담긴 문구사를 몇 군데 찾아 오래된 이야기를 들어봤다.
 

용담동 동네 문구사 사장님. / 김애중


청주 용담동 작은 초등학교 앞에서 문구사를 운영하는 ㄱ사장님은 1988년부터 가게를 지키고 있다. "그때만 해도 학생들이 한 500 명 정도 됐어요. 이 근방에 문구사가 여러 개 있었는데 다 없어지고 나만 남았어요. 지금은 학생이 200명도 안 돼요. 그런데다 요즘엔 학용품이 잘 안 나가요. 이제 이 장사도 언제 그만둬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문구사 수입이 점점 줄어들어 타산이 맞지 않지만 그래도 아침에 가게 문을 열 때는 기분 좋다고 한다. "요즘 애들은 정말 예뻐요. 인사도 잘하고 말도 잘해요. 등교 시간이 지나면 이제 진짜 손님들이 와요. 이분들은 뭘 사러 오는 게 아니고 뭘 갖다 주러 옵니다. 동네 사람들이 떡이나 나물, 과일도 들고 옵니다. 그러면 이 문구사가 동네 사랑방이 돼요. 이 나이에 이렇게 사는 것도 얼마나 좋아요. 이래서 문을 못 닫아요." 조금 전 그늘진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언젠가는 청년 둘이 찾아와 이 학교 졸업생이라고 하면서 여기 생각나서 왔다고 하더라고요. 멀리 경기도에서 내려왔대요. 장사가 안돼도 어지간하면 문을 엽니다. 혹시 왔다가 그냥 가는 친구들이 있을까 해서요." 

40년 가까이 학교 앞을 지키고 있는 문구사는 그냥 문구사가 아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늘 살아있는 그 무엇이다.
 

수동 동네문구사 사장님이 예전에 만들던 명찰을 들고 있다. / 김애중


상당구 수동은 여중, 여고가 같이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도 남은 문구사는 달랑 하나다. 주인장 ㄴ사장님은 스물다섯 살에 이 가게를 차렸다고 한다. 한 동네에서 42년을 지내고 있으니 인생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엔 아침 6시부터 가게 문을 열고 밤 11시까지 장사를 했어요. 그때는 여고에 주간반 말고도 야간반이 18학급이나 있어서 밤까지 일해야 했어요. 여기는 상고 학생들이라서 주판이나 문제집 같은 걸 많이 팔았어요. 또 교복에 붙이는 명찰을 제작해서 팔기도 했어요." 

한쪽 구석에 있는 명찰 기계를 찾아와서 만드는 방법을 시연해 보인다. 명찰이 빛나는 교복을 입고 한 무리 여고생들이 재잘거리며 교문으로 들어가는 풍경이 그려진다.

"예전에는 상고 졸업 후 바로 취직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가끔 월급 탔다고 하면서 큰 수박을 들고 오거나 빵을 잔뜩 사 오는 졸업생들이 있었어요. 그럴 때는 정말 내 제자라도 되는 듯 마음이 뿌듯해지더라고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잘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상당구 영동에 있는 문구사 사장님. / 김애중


상당구 영동에서 오랫동안 문구사를 운영하는 ㄷ사장님의 체험도 비슷하다. 이곳도 40년 가까이 학교 앞을 지키고 있다. "처음엔 학생들이 천 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4백 명 정도밖에 안 됩니다. 수익이 거의 없어요." 남자 중학생들을 상대하다 보니 특별한 일도 있다.

"오래전 일인데 한 번은 학교 선생님이 학용품을 이만큼 싸 들고 한 학생을 데리고 왔어요. 그 학생이 우리 가게에서 물건을 조금씩 몰래 가져간 거예요. 나중에 부모님에게 그 물건값을 다 돌려받았어요. 잘 컸는지 궁금하네요." 

졸업생이 어른이 돼 모교에 교사로 왔다고 인사할 때는 내 자식 일처럼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지금 제 나이가 70대 중반인데 학생들 보는 일이 좋아서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계속할 생각입니다."
 

팔리지 않는 오래 된 학용품을 보물인 양 간직하고 있다. / 김애중


아이들을 위한 만물상이라고 불리던 동네 문구사는 2000년대 들어 급격히 줄었다. 저출산으로 인한 학생 수 감소, 대형 문구사 이용, 학용품 무상공급 정책 등으로 동네 문구사에 큰 타격을 주었다. 요즘엔 완구나 간식을 찾는 학생들이 더러 있을 뿐 학용품을 사러 오는 학생은 드물다. 가끔 옛날 물건 수집가들이 찾아와 먼지 쌓인 재고품을 뒤지거나, 한때 불량식품이라고 지탄받던 추억의 과자를 찾는 어른 손님이 있다고 한다.

이제 예전 문구사 풍경은 영화에서나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시대가 변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다정한 친구와 이별하는 듯 아쉬움이 밀려온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