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중의 현장 속으로] 음악에 대한 오랜 갈망… 잃어버린 꿈을 찾아 밴드에 도전하다
김애중 기록활동가·수필가·중부매일 시민기자 멤버들과 합주 과정은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소중한 시간 밴드는 나의 숨구멍,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힘의 원천·희망 퇴근 후 열정·시간 투자, 인생 후반기에 기대와 설렘 가득 조금씩 실력이 늘어갈 때 맛보는 희열이 열정으로 선순환
[중부매일 김애중 시민기자] 예순 살이 돼 본 사람은 안다. 어느 날 갑자기 회갑이 된 자신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이 많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동안 나의 꿈은 어디로 갔을까. 잃어버린 시간과 꿈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불면의 시간은 켜켜이 쌓이고 마치 오래된 흑백영화를 찾아보듯 과거를 하나씩 더듬어 본다. 가벼운 말 한마디에서 희망을 품고, 사소한 일에서 절망을 느끼게 되는 자잘한 일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했다. 꿈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다 어느 틈에 조금씩 사그라졌다. 그동안 내 앞으로 다가왔던 시간을 온전히 내 시간으로 살았을까.
오래된 기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픈 상처가 먼저 고개를 내민다. 가족끼리 서운했던 일, 내가 좀 더 잘하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 실수에 대한 자책감에 가슴이 쓰리다. 그래도 이 험한 세상을 나쁜 짓 안 하고 이 정도면 잘 살아냈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기억을 되돌아보는 일은 가끔 진정제가 되기도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어릴 때 살던 마을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그는 기억을 통해, 흘러가 버린 시간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깨달음으로 자신의 기억을 소재로 소설을 쓰고자 결심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과정이다.
여기, 뒤늦게나마 음악으로 잃어버린 시간과 꿈을 되찾는 사람들이 있다. 하진 씨는 얼마 전 만 60세가 되면서 일터를 잃었다. 그녀가 일터 대신 자주 찾는 곳은 밴드 연습실이다. 오래전부터 갈망하던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진 씨가 신입 드러머로 가입한 곳은 여성으로만 구성된 ‘슈가밴드’다. “어릴 때부터 두드리는 걸 좋아했어요. 그동안 여건이 안돼서 못했는데 백수 된 김에 제대로 도전해보려고 해요.”
하진 씨가 음악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중학교 때부터다. 고등학생인 언니가 어느 날 기타를 집으로 들고 왔다. 웬 기타냐고 다그치는 엄마에게 친구가 빌려줬다고 했다. 언니는 서툰 솜씨로 기타줄을 뜯으며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나 트윈폴리오의 ‘하얀 손수건’을 불렀다. 빌려왔다는 기타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언니가 책 살 돈을 꼬불쳐 몰래 산 것이다. 가끔 언니 친구들이 몰려오는 날에는 딩딩딩딩 음도 맞지 않는 소리를 내며 ‘우먼인러브’나 ‘아바’ 노래 같은 팝송을 되나가나 불러댔다. 언니가 없을 땐 하진 씨가 기타를 차지하고 언니 흉내를 냈다.
누가 마흔 살을 불혹이라 했는가. 하진 씨는 마흔쯤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간신히 드럼에 도전했다.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며 틈틈이 독학하다시피 연습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마음속에 늘 미련이 남았는데 이번에 다시 도전한 셈이다. 하진 씨가 가는 연습실은 청주시 상당구에 있는 건물 지하 1층에 있다. 좁은 계단을 내려가 묵직한 철문을 열면 각종 악기가 세팅되어 있는 작은 공연장이 펼쳐진다. 최근 50~60대 여성들로 구성된 슈가밴드 팀이 연습하는 공간이다. 드러머, 베이스기타, 일렉기타, 보컬 2명에 하진 씨까지 여섯 명이 한 팀이다. 한번 연습을 시작하면 보통 서너 시간을 넘긴다.
밴드를 이끌고 있는 리더, 정은 씨는 도로공사용 중장비를 다루는 특수직업을 갖고 있다. “들릴 듯 말 듯한 중저음이 좋아서 베이스기타를 배웠어요. 멤버들과 합주하다 보면 모두 가족같이 느껴지고, 실력이 조금씩 늘어갈 때 밴드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어요.”
일렉기타를 어깨에 걸친 폼이 멋진 정미 씨는 현란하게 멜로디를 구사한다. 어릴 적 기타 치는 교회 오빠 모습에 반해 그때부터 조금씩 배웠다고 한다. “저에게 밴드는 숨구멍이에요. 일주일간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자 희망이죠. 기타도 잘 치고 싶고, 폼생폼사라고 멋있게도 보이고 싶어요.”
보컬로 활동하는 태진 씨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살림만 하는 집순이였다. 이제라도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노래를 배우다 슈가밴드를 만났다. “노래 부르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한데 멤버들과 합주하면서 연습하는 시간이 정말 좋아요.”
겉모습만 보면 새촘하기 그지없는 진숙 씨는 드럼 앞에 앉으면 딴사람이 되는 듯하다. 빠른 박자도 거침없이 두드려대는 드럼 소리는 연습실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슈가밴드가 여성들로만 구성돼서 저는 그게 좋았어요. 드럼에 대한 제 열정으로 새로운 도전을 했는데 기대와 설렘이 가득합니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미영 씨는 여기에서 제일 막내다. 생업에 바쁜 중에도 반복되는 일상이 무료해지는 시점에서 ‘당근’을 통해 슈가밴드를 만났다. “좋아하는 노래를 마음껏 부르니 우울감이 없어지더라고요. 언니들과 함께 공연 활동을 많이 하고 싶어요.”
다양한 직업만큼 외모나 성격도 독특하다. 악기들의 합주만 있는 게 아니다. 각자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고 하나로 뭉치기 위해 정성을 들이고 있다. 인생이 노을로 물들기 시작할 때 삶의 밀도는 높아진다.
남겨진 짧은 미래를 어떻게 채울지 진정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것이다. 그리고 꿈에 도전한다. 청주시에는 30여 개의 밴드 동아리가 음악으로 인생 후반을 장식하고 있다. 이젠 머뭇거리지 말고 직진하기를 응원한다. 잃어버린 꿈을 되찾는 그날까지 모두 힘 내시기를!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