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에 제작된 청주읍성도를 보면 천년고도의 상징인 청주읍성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인 남석교(南石橋)가 선명히 보인다. 읍성안은 두 구간으로 나뉘어져 현 중앙공원 자리엔 충청병마절도사가 기거하던 충청병영과 청원군청 자리에 둥지를 틀고 있던 청주목 관아가 머리를 맞대고 있다.
 청주의 하늘로 높이 솟구친 용두사지철당간도 그 안에 있고 중심도로가 남북과 동서축을 형성하고 있다.무심천은 청주읍성의 자연적 해자(垓字:적병의 침입을 막기위해 성 둘레에 파놓은 연못)로 읍성을 감돌아 가며 제방으로는 능수버들이 채질하고 있다.
 무심천을 건너는 유일한 돌다리인 남석교가 여유있게 냇물을 가로지르고 그 옆으로는 성리학자 성제원(成悌元)과 기녀 춘절(春節)의 로맨스가 아로새겨진 정진원(情盡院:관리들의 숙박소)이 있다.
 읍성안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로는 일제시 혼 마치라 불리던 본정(本町)을 거쳐 해방후 남문로~북문로로 불리다가 오늘날에는 성안길로 통칭되고 있다. 성안길을 중심으로 관아, 객사와 민가가 조밀하고 성밖 석교동, 서문동 일대에는 큰 시장이 형성돼 있다.
 이같은 청주의 형태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존재했더라면 자연적인 민속촌이요 영화세트다. 이곳에서는 로마의 휴일보다도 더 멋진 청주의 휴일이 연출되었을 것이고 안동 하회마을 보다도 더 고풍스런 모습들이 길거리를 수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청주드림은 그야말로 꿈에 그치는 것이요, 어디까지나 가정법 과거에 그치는 사항이다. 선비와 병정과 백성들이 거닐던 그 거리엔 오색찬란한 불빛아래 노랑머리 마네킹이 쇼윈도우에서 실실 웃고 있고 그 간판을 걷어내면 일제의 적산가옥이 뼈대를 드러낸다.
 이 참담한 전통의 파괴는 일제에 의해 저질러졌다.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는 1911년, 시가지개정이라는 미명아래 청주읍성을 송두리채 파괴하여 그 성돌로 하수도를 쌓는 만행을 저질렀다.전국에는 여러 읍성이 존재하는데 유독 청주읍성이 몽땅 사라진 것은 임란시 청주읍성에서 왜병이 패퇴한데 대한 일종의 앙가픔 심리가 작용했던 것 같다.
 일제가 전통문화재를 헐어버린데다 그후에 불어닥친 근대화 바람으로 읍성주변에는 빌딩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성안길은 일제의 적산가옥에다 현대식 빌딩이 뒤엉켜 국적불명의 거리가 되었다. 경주나 부여처럼 도시 전체에서 역사의 향기가 피어 올랐으면 오죽 좋으련만 그런 냄새는 일부러 청주목 동헌인 청녕각이나 국보 제41호인 용두사지철당간을 찾아봐야 간신히 맡을 수 있다.
 청주읍성과 남석교는 흥덕사지, 상당산성, 정북동토성, 용두사지철당간, 신봉동 백제고분 등과 더불어 청주의 역사적 정체성을 자리매김하는 핵심적 문화재다. 근 100년 동안 지하에 묻혀 구원의 손길만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다행히도 청주시는 난제로 꼽혔던 청주읍성과 남석교를 복원한다고 한다. 청주읍성의 복원은 전체가 아닌 부분적 복원이요, 상징적 복원이라는 차선책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토지매입 문제때문에 완전복원은 불가능하고 남문이나 북문의 복원, 그리고 성벽의 위치와 모습을 시각적으로 알려주는 방법을 택해야 할 것이다.
 천년고도로의 부활은 청주시의 의지에다 시민의 문화재 사랑이 보태어질때 가능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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