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건축문화를 보면 그 유구한 역사와 고풍스런 맛에 관광객의 눈길은 여지없이 압도당하고 만다. 고대의 건축 유적은 말할것도 없이 육중한 중세의 건축물이 간선도로변이나 골목에서 세월의 무게에도 아랑곳 없다는듯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뿐만아니라 민간인들이 사는 주택들도 2~3백년 정도 나이를 먹은 것들이 수두룩하다. 알프스 산맥을 사이에 둔 남부 독일, 오스트리아 일대를 특히 바바리아 지방이라고 부르는데 그곳에는 3백년 이상된 주택들이 외벽에 노란 페인트로 화장을 하고 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삐걱거리고 책상이나 식탁 등 실내가구들은 오래된 주택에 박자를 맞추기라도 하는듯 흠집 투성이다. 모든 것이 불편함에도 주인은 그 가구를 바꾸려들지 않고 집을 다시 지으려들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던 집에서 조상의 숨결을 맡으며 그대로 살고 있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의 건축문화는 그 생명력이 너무도 짧다. 개발 지상주의의 바람을 타고 낯설은 빌딩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어느 거리를 몇달만에 가보았더니 못보던 건물이 여러채 생겨났다. 아이들의 블럭쌓기 놀이처럼 뚝딱하면 지어지고 뚝딱하면 없어지는 초고속 건축문화에 건축주도 아니면서 괜한 안달이 난다.
 C대 건축과 모 교수가 내덕동에다 집을 지었다. 전공이 건축인데다 자기가 살 집이어서 튼튼히 지어갔다. 그런데 중간에서 인부들과 시비가 자주 붙었다. 건축주는 시공에서 부터 마무리까지 이모저모를 꼼꼼히 살피고 인부들은 그전에 공사하듯 적당히 넘어가려 했던 것이다.
 그 교수는 벽면이 고른가, 건축자재를 규격대로 잘 섰나 등을 체크하는데 부아가 치민 어느 미장공이 교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공사를 포기했다고 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지어진 그 교수의 집은 동네에서 '벙커'로 통한다.
 우리 건축문화가 원래부터 날림이나 부실공사는 아니었다. 황룡사 9층목탑, 익산 미륵사지 9층목탑, 옛 궁궐, 그리고 문화재로 지정된 여러 고가들을 보면 집을 짓는 정신이 종교에 가깝다. 목재를 말리고 다듬고 못 하나 쓰지 않고 결구식으로 짜맞추고, 지붕의 기와 막새에 일일이 무늬를 새겨넣고, 배흘림 기둥을 만들고, 우물마루를 짰다. 정성과 공력을 다하여 이렇게 만든 집은 수백년이 지나도 끄떡없이 우리곁에 남아 있다.
 새로 지은 집이 좋은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물기가 덜 마른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 왠지 몸이 찌부둥하다. 각종 화학성 건축자재에서 흘러나오는 포름알데히드 등 자극적 성분이 몸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걱정은 새 집을 지을 경우 헌 집의 건축 쓰레기를 어디다 처리해야 할 것인지 실로 난감하다. 특히나 아파트를 재건축할때는 엄청나게 많은 폐건축 자재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 많은 건축자재를 땅에 계속 묻다간 얼마 안가서 금수강산은 쓰레기 강산으로 돌변할 것 같다.
 앞으로 집을 지을 때는 조상이 가르쳐 준 정성대로 백년, 천년 대물림을 할 튼튼한 집을 애초부터 설계하는 일이다. 돌로 된 2백년전의 보도 블럭을 지금까지 쓰는 파리 시가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큰 눈을 뜨고 삽질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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