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컬쳐디자이너·에세이스트

아산시 신정호수공원 가을전경 모습 /아산시청<br>
아산시 신정호수공원 가을전경 모습 /아산시청<br>

가을엔 편지를 쓴다. 지난 시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해 온 나의 가족과 형제들에게,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온 병상의 어머니에게, 삼겹살에 소주한 잔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들에게, 근본 없는 사내의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보듬으며 험한 길 자박자박 함께 해 준 스승과 동료와 이웃들에게 편지를 쓴다. 무심천 강변의 돌들을 들어 올려 탑을 쌓던 이름 모를 노인에게, 좌절의 숲에서 뒷걸음질 치는 내게 천사처럼 다가온 그대에게, 지난 여름 뜨거웠던 날들의 상처를 딛고 알알이 영근 들녘의 열매들과 따사로운 햇살과 밤하늘의 달에게도 편지를 쓴다.

"당신은 나의 운명, 나의 사랑, 나의 모든 것, 당신 때문에 내가 삽니다. 기쁜 일, 슬픈 일, 보람된 일, 아쉬운 일 모두 당신과 함께 했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견딤이 쓰임을 만들고, 이 모든 극적인 순간을 함께 했으니 당신의 나의 별입니다"라고 쓴다.

가을엔 편지를 쓴다. 은행나무 잎들은 거리의 풍경을 담아 노랗게 쓰고, 단풍나무는 제 몸 속에 있는 붉은 피를 뽑아 빨갛게 쓰고, 느티나무는 갈색 깃발을 휘날리며 온 몸을 부르르 떨며 쓰고, 산초나무는 마지막 잎을 떨구며 소리 없이 쓰고, 자작나무는 푸른하늘 아래 바스락거리며 쓴다. 담쟁이는 엉금엉금 기어가며 색연필로 쓰고, 가을국화는 엎드려서 사랑의 연가를 부르며 쓰고, 감나무는 담장너머 풍경을 담아가며 쓰고, 코스모스는 핑크빛 원피스를 입고 춤을 추며 쓰고, 해바라기는 들녘에 물감을 뿌려가며 쓴다."아름다웠다. 행복했다. 함께해서 고마웠다. 이만하면 됐으니 나 이제 돌아가련다. 자연의 품으로 자연과 함께 돌아가 한 줌의 흙이 되련다.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라고 읽는다.

바람은 온 몸을 비비며 쓴 편지, 눈물로 쓴 편지, 밤새워 쓰다 지우고 쓰다 지우고를 수없이 반복한 편지를 전달하는 배달부다. 어떤 날은 쓰다만 편지를 가져가고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주섬주섬 챙겨간다. 누구에게 전하는지 알 수 없지만 바람은 쉬지 않고 편지를 가져간다. 그 편지를 읽던 이름 모를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고, 중년의 신사는 가슴이 뭉클하며, 늙은 부부는 옛 추억에 젖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이처럼 가을엔 사람도, 자연도 편지를 쓴다. 사랑을 한다. 내게도 사랑이 있었던가 묻지를 말라. 삶은 곧 사랑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한다는 징표다. 지나온 날들이 사랑으로 집을 짓고 사랑으로 저마다의 꿈을 빚어왔기에 이 땅은 그래도 살만한 것이다. 그러니 가을엔 사랑의 편지를 쓰자. 뜨거운 사랑을 하자.

손으로 편지를 쓴 것이 얼마만인가. 생각하니 아득하다. 앞만 보고 달려왔다. 삶의 최전선에서 전투를 하듯 이를 악물고 살아왔다. 여기가 아니면 안 된다며 밤낮없이 일만했다. 일의 노예가 됐다. 그러니 편지를 쓸 수 있었겠는가. 책 한 권 읽는 것도 버거운 세상, 편지 하나 쓸 수 없는 삶, 인생의 여백을 만들 수 없이 허겁지겁 달려왔다니 실로 부끄럽고 어리석다.

변광섭 에세이스트
변광섭 컬쳐디자이너·에세이스트

가을엔 생각이 더욱 깊어진다. 길을 걷다가 흩날리는 낙엽을 보면 가슴이 시리고 아프다. 바람이 어깨를 스치기만 해도 화들짝 놀란다. 궁핍한 햇살이 내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면 눈물이 쏟아진다. 그 때마다 생각이 깊어지고 그리움이 사무친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사는지 번뇌에 쌓인다. 그러니 가을엔 편지를 쓰자.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을, 상처깊은 풍경들을 연필로 꾹꾹눌러 편지를 쓰자. 이왕에 쓰는 편지 색연필로 쓰자. 내 삶을 담고 풍경을 담고 그리움을 담고 사랑을 담은 편지를 쓰자. 나무들이 야위고 개울물이 야위고 귀뚜라미 울음이 야위어가는 이 가을엔 편지를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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